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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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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아들 얘기


BY dansaem 2001-12-08

지지난 수요일은 작년에 돌아가신 시할머니의 첫제사였다.
그리고 토요일은 시증조부 기제사였는데
일요일이 친정 막내동생의 결혼식이라 어머님 혼자 준비하시고
나는 금요일에 친정에 가서 이바지 음식과 폐백음식 장만으로 바쁘게 보냈다.

아이들 데리고 한복을 입기가 너무 거추장스러워 생활한복을 한 벌 장만했다.
갈색과 고동색이 섞인 것이라 좀 나이가 들어보이는 듯도 하지만
뭐, 그 정도야 나의 미모로 덮어질 수 있으니...ㅎㅎ

그 한복을, 남편은 일요일 결혼식장에서 처음 봤다.
"어때? 나 이뻐?"
"글쎄, 뭐,... 몸매가 좀 가려지긴 하네."
으이구, 웬수!
하여간 뻣뻣하기는...

식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
후배집에 맡겨놨던 우리 막내를 찾으러 가는 길이었다.
둘째 동생이랑 큰 아이 둘은 차에서 기다리라 하고
둘이서 아기를 데리러 갔다.
아파트 모퉁이를 돌아서 차가 보이지 않은 쯤에 왔을 때
이 남자가 내 손을 슬쩍 잡는다.

"이쁜데!! 가을 분위기가 나는 걸."

ㅋㅋ 이제서야 본심을 드러내는군.
그러나 역시 한 뻣뻣 하는 나,
"치워. 왜 이래."
가차없이 손을 빼버린다.

나도 결혼 전에는 정말 분위기 많이 탔는데
이젠 정말 무드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는 것 같다.
처녀적엔 비가 오는 걸 무척 좋아했었다.
강의실에서, 현관에서, 학생회관에서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괜시리 가슴시리던 기억이
분명 있긴 했건만은.

지금은
비- 하면
에고, 어설프고, 빨래 안 마르고, 귀찮아서 싫어한다.
하루라도 빨래를 안 하면 기저귀가 모자라니
악착같이 빨아댈 수 밖에 없다.

며칠 전 첫눈이 오던 날,
남편은 부산에 일이 있어 아침 일찍 출발했다.
몇 시간 후, 전화가 왔다.
대구 근처를 지나는데 첫눈이 오길래 전화를 했단다.
생전 안 하던 짓(?)을 하길래 좀 의아하긴 했지만
그래도 좀 분위기를 맞춰주면 좋았으련만
대뜸 나온다는 소리가
"그럼, 길 미끄럽겠네." 였다.

그러고 보니 불쌍한 건 내가 아니라 오히려 남편인 것 같다.
밤에 애들 재워놓고 분위기 좀 잡으려면
"나 화장실 가고 싶어."
하고는 벌떡 일어난다.
옷 속으로 손이라도 들어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여보! 나, 등 좀 긁어 줘."

신랑은 이제 척 하면 척이다.
마누라 좀 안아 볼려면 미리 알아서 등 긁어준다.
긁어줄려면 그냥 긁어주지 생색은 다 내고 있다.
"에고, 이런 마누라 내가 아니면 누가 데리고 사나?"
"그래, 그 소리 왜 안 나오나 했다."
등등...
그러다 가끔씩은 등짝을 한대 후려치기도 한다.
넓직하니 탄력도 있으니 때리기야 좀 좋겠는가만은
여보, 이젠 살살 잘 좀 긁어줘 봐, 응?

쓰고 보니 어째 좀 그렇다.
분위기있고 잔잔한 글을 쓰려고 했는데
결국 등 긁는 이야기만 하고 말았네.


큰 아이 이야기를 하나 더 하고 가야겠다.

요즘 아들에게 초미의 관심사는 로보트이다.
만화영화에 빠져서 물어보는 것, 얘기하는 것이 온통 로보트다.
제 이모 결혼식 날, 한참 주례사가 진행중인데
이 녀석이 작은 소리로 뭐 물어볼 게 있단다.
"엄마, 엄마! 근데 아톰은 어떻게 태어났어?"
얼마전 인터넷을 뒤지다가 아톰 그림이 나오길래
엄마가 어릴 때 봤던 만화영화라고 얘기해 줬더니 이것 저것 궁금한 게 많다.
누구랑 누구랑 싸우면 누가 이겨?
누구랑 누구랑 중에 누가 힘이 더 세?
둘리 동생이 어쩌구, 탱구가 어쩌구, 날아라 슈퍼보드가 어쩌구...

결국엔 합체변신하는 로보트 갖기를 하도 소원하길래
작은 걸로 하나 사줬다.
그랬더니 그 다음 날 유치원에 가져가서 논다고 한다.
다음 날도 가져가더니 올 때는 빈 손이다.
그래서 어쨌냐고 물었더니
친구가 자꾸 갖고 싶다고 해서 줬댄다.
그렇게도 좋아하던 걸 선뜻 주었다니 괜히 안스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그 며칠 뒤, 결혼식이 있던 날
동생이 아이에게 로봇을 하나 사 줬다.
그걸 또 이틀을 유치원에 갖고 가더니
그 날 저녁,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 김○○가 전의 그 로보트 다시 준대."
"그래, 다시 준대? 왜? 근데 너 새로 산 건 어쨌어?"
"음, 그거 주면 전의 꺼 다시 준대서 줬어."

근데 그 다음 날도 아무 것도 안 가져왔다.
"김○○가 안 가져왔든?"
"아니, 갖고 왔는데 다른 친구가 두 밤만 갖고 놀다가 준다고 해서 줬어.

어이구, 내가 말을 말아야지.
친구 주는 걸 야단칠 수도 없고
주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사실 이런 경우가 첨도 아니다.

한번은 앞집 사내아이가 놀러 왔는데
냉장고에 있던 빵을 먹겠다고 한다.
그런데 빵이 두개 뿐이라서 어쩌나 했더니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으니 걱정말랜다.
그리고는 빵을 가져와서
앞집 아이 하나, 동생 하나 주고는
저는 안 먹는댄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잃어버리기도 잘 하고
새 거랑 헌 거랑 바꿔오기도 한다.
이걸 착하다고 해야하나, 어리숙하다고 해야하나?

'성질 못되고 이기적인 것 보다는 낫겠지.'
'그래, 때리고 오는 것 보다 맞고 오는 게 더 낫겠지.'
그렇게 생각 하면서도 사실 속이 좀 상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고슴도치 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