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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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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가


BY 아리 2001-12-02

울 친정 어머니는 남자 동생을 넷 두신 고명딸이셨다 ..

일반적으로 시누이와 올케 사이는 그리 좋은 관계가 아니라지만

울 엄니는 천성적으로 남을 비난 하는 사람이 못되셨다

가장 큰 이유는 당신 자신이 뭐든 그리 뛰어나게 잘 하시는 것두

손끝이 여물게 살림을 잘하시는 분이 아니어서인가 ..

좌우간 ..어느누구두 입에 올리면서 흉을 트집을 잡지 않으셨다

어느정도인지는 잘모르지만

나의 친정 어머니가 부억에서 반찬을 만드시면

모든 그릇이 다 나와 있구 보다 못한 우리 아버지가
그 시대에두 무얼 연신 친워 주시구 도와주시기 일쑤였다

ㅎㅎㅎㅎ

난 물론 직접 뵙지 못했지만 우리 친할아버지께서 우리 집에

-큰 아들 집에 다니러 오시면

그 두루마기 자락을 걷어 올리시면서 어디에 앉으셔야

하나 하구 한참을 두리번 거리시구 그 두루마기 자락을

이리저리 한번씩 휘돌리시기 일수 일지경으로

집안을 어지러 놓으셨었다는 일화가 있을 지경 ...

좌우간 이 이야기는 살림 못하는 친구들에게 하면

서루들 얼굴 쳐다보며 박장대소 하는 모습이

자기 가슴이 찔려서이라나 ..

좌우간 우리 외숙모님들은 우리엄마와는 정반대루

길어다 쓰는 물이라두 걸레까지 맑은 물에 헹구고

대청마루며 곳간이구 어디든 반들 반들 ..


그래서인지

외숙모들과두 사이가 썩 좋은 편이셨다

그 외사촌들은 시두 때두 없이 우리집을 드나들구

나두 별 어려움 없이 외가를 방문 하곤 했다

우리 집은 식구들이 많기 땜에 언제나

수없이 많은 책들과 참고 자료가 많은 거대한

도서관같은 구실을 했는지두 모르구

용인에서 땅을 제법 가지구 계신 할아버지 덕분에

쌀걱정은 없었으므로 우리식구 들만 밥을 먹는 기억은

별루 없을 지경

좌우간 내가 자주 드나들던 외가는 그 중에서

나하구 나이차가 적은 외사촌들이 있는 네째외가였다



그곳은


나의 크나큰 쉼터 이곤 했다 ..

아주 낡고 작은 집에 세를 들어서 사는

좌간 독채라구

방 두칸에 화장실이 하나 있는 정도 였던 것 같다

합정동이란 동네가 지금은 어떻게 변해 있는 지는 모르지만

그 시절엔 친가와 외가가 같이 있는

소위 친가는 무척 큰 이층 양옥에

그럴듯한 정원을 가지고 있는 아주 멋있는 부잣집이었구

부촌과 빈촌이 병행해 있는 그런 동네였다

외가는 낡은 구조의 셋집이었다는 기억은 분명하다

항상 그곳에서 내리면 얼마나 빠른 걸음으로

거길 갔었는지 ..


그곳에선 겨우 먹는 건 정부미쌀밥 -실재루 그 쌀은 보리가 반은 섞여 있는 듯한 맛이 없는 쌀-
김치찌개가 다 였다 ..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외가에 가면 궁한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소위 빨래판을 기워쓰는 정도 였으니 ..

지금 누가 그걸 상상이라두 할 수있는 지 ..

나는 외가에 갈 때 마다 생각하는 건 친가 집 냉장고에

튀어나올 것 같은 고기 나 갈비 두덩이만 맘대루 가지고 갈수 있다면

하는 조그만 상상 같은 거 참 공평하지두 못하지

친가집 냉동실은 언제나 고기가 가득차서 문을 열기만 하면

툭 하구 떨어져 나올 것 같은 고기들이 외가에선 구경두 할수 없는 일이다

외가에 가면 나보다 두살어린 여동생이

언니 왜 이렇게 안왔어

우린 맛있는 것 먹을때 마다 언니를 외쳐댔는데 ..

나의 방문에 언제나 각별한 환영을 보이면서 ..

이렇게 말하곤 했다 ..

에구 나 고기 질렸어 그동안 넘 먹었더니 ...

이제 언니두 오구 그랬으니 오랫만에 우리 김치 볶음밥줌 해먹자

그리구 우리집 과일들은 이렇게 입체감이 있어

-소위 과일 가게에서 파시라구 파는 과일 -

언니가 어디가서 이런 것을 구경 해보겠어 ..

왜 이리 깍아놓으면 멋있는거야 세모 네모 다 있네 .

때로는 천정에서 쥐들이 춤을 추면서 뛰어다니면

사촌들은 조금두 당황하지 않구

"어 아리 왔다구 환영회 까지 ..."

나는 두려워서 목이 자라목이 되었건만 그들은 부끄럼을

미화하고 있는 지경



어디서 나오는 건지는 모르지만

그네들은 언제나 웃음과 여유를 잃지 않구 있었다

나름대루 집에서두 풍요롭구 따뜻하게 지냈었는데

이집에서 곤혹 스러운 상황을 겪어 내면서두 왜이리 이 곤혹 자체가 즐거웠던지 ,,(?)

이 곤혹이라 함은

예를 들어 나 같은 경우 종로가 집이구

쓰레기는 대체루 미화원 아저씨가 제시간에 항상 치워주시는 형태구

빈티나는 이 동네에서는 따로 쓰레기 치워 가는 비용을 부담하지 않아서인지 이 청소차가 지나가면서 종을 치면 사람들이 너두 나두 그 냄새나는 쓰레기를 들고 서있다가 그걸 그 아저씨에게 내는 형태 였던것이다 물론 사촌들은 그걸 내가 절대 경험 하지두 못하게 하지만 누가 뭐라 하지않아두 자율적 솔선수범이 가능하게 하는 이 집안의 분위기에 눌려 그 싫은(?)일을 기꺼이 할수 있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는 ..

세상에 연탄을 피우는 일은 또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집에서는 아주 할 생각 조차 엄두 조차 내지 않던 일을 다만 내가 그 사촌 여동생보다 언니라는 말을 듣는 입장이라 하여 눈물을 흘리며 ....

그 연탄불 살리기 평생 내가 해본 일중 어려운일 ..-그 당시-

글쎄 누가 시켰나 ..나 혼자 정의의 사도루 나서서

그 꼼짝 못하게 하는 위대한 힘이 솟구치는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

좌간 난 외가에 갈때마다 내 용돈으로는 해결이 안되는 일을 종종 하곤 했다

엄마가 아끼는 수건을 몇장씩 가방에 넣어서

몰래 가져다 주거나

멸치나 뭐 그런 마른 찬을 나르기두 하구 좌간 뭐가 보이면 저걸 얼른 외가에 가지구 가 사촌들하구 먹어야지 하는 궁리를 잼있어 했다

그럼에두 불구 하구 ...

우리 사촌 오빠는 밥을 먹을 때마다

그 집에서 유일하게 고급스러운 반찬이

버터두 아니구 -그 대용으로 마아가린을 밥에 넣구 비벼 먹는 것이었는데

"야 아리야 내가 널 아무리 사랑해두 제발 마아가린은 조금만 먹어라 "하구

눈총 아닌 눈총을 받는 것이다

이름하여 집에서는 막내딸이라하여 다른 사람은 얼씬두 못하게

하는 반찬을 내 맘대루 먹는 것돠 달리 그 눈치(?)를 받으며

밥을 맛나게 먹곤했다

아 그리운 외가 ...

무엇이든 내가 온종일 종알 거려두 누구든 경청하구 ..

엄마 아리 언니는 넘 지적이야 ..

언니는 이두 이쁘게 났다 .

어쩌구 저쩌구

엄마 이노래가 아리가 좋아하는 노래래 ..

언니 이제 언제 또 오나 ..

우리가 목마르게 전화를 또 해야지 ..

.................

외가에 다녀오면 나는 뭔지 모를 목이 메이는 걸 경험 하곤 해야 했다

아 모두가 잘 살면서 따뜻하게 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