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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이야기...[1]


BY ns05030414 2001-11-28


할아버지 덕분에 잘 가꾸어진 정원이 있는 집에서 살았다.
할아버지를 사람들은 선비라고 불렀다.
그 말에 청개구리같은 이 손녀 딸 할 말이 많지만 차차 하기로 하고...
할아버지는 평생을 시골에 살면서 손 끝에 흙이라고는 꽃을 가꾸는 일 외에는 묻혀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국민학교 5학년 때였다고 기억한다.
선생님은 잘 가꾸어진 정원을 보고 싶으면 우리집에 가서 보라고 아이들에게 소개를 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소개될 만큼 훌륭한 정원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정원이었음은 분명했다.

황토에 듬성듬성 돌이 박히고 짚으로 엮은 이엉이 덮힌 나즈막한 흙담 사이로 난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면 양 쪽으로 꽃밭이 있었다.
사립문 오른 쪽에는 하늘 높이 솟은 가죽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그 가죽나무를 타고 올라간 능소화는 서 너 길 높이에서 그 가죽나무에 마치 팔찌를 끼워놓은 듯 보였다.
아프리카 여인들의 팔에 끼워진 팔찌처럼 여러 겹으로 감긴...
유월이면 그 팔찌는 주황색 꽃이 되어 가죽나무를 더욱 화려하게 장식하곤 하였다.
높은 곳에 핀 그 꽃들은 멀리서도 눈에 띄어 그 화려함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한약재로 쓰이는 것이라며 떨어진 꽃잎을 주어 말리던 할머니 생각이 난다.
할아버지는 오가피 나무도 화단에 심어 가꾸었다.
가을이면 붉은 빛이 도는 검은 열매가 매달리곤 하였는데 그 열매로 술을 담았다.
옛날 산 속에 다섯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오가피 열매로 담은 술을 먹고 모두 신선이 되어 날아갔다는 이야기도 빼 놓지 않았다.
그래서 그 이름이 오가피가 되었다고.
오가피나무를 지나면 자목련과 백목련이 나란히 있었다.
그 옆에선 바나나 나무도 자라고 있었다.
그 넓은 잎새는 여름이면 남국의 싱그러움을 조금이나마 전해주고 있었다.
겨울이면 얼어죽지 않도록 짚으로 겹겹이 싸고 새끼줄로 묶고 밑에는 흙을 돋우어 두곤 하였다
오른쪽으로 돌아 가장자리엔 매화가 있었다.
겹꽃이었는데 솔직히 책에서 읽었던 것 처럼 눈 속에서 피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림에서 보는 눈 속에 피는 매화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날 조금 실망시켰던 꽃이다.
그 뒷쪽엔 어렸을 적 내 키보다 훌쩍 컸던 접시꽃이며 참나리꽃이 있었다.
참나리꽃을 수술을 만지면 손에 주황색 물이 들곤 하였다.
봉숭아물을 손톱에 들이는 대신 참나리꽃 수술을 손톱에 문질러 일회용 봉숭아물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손을 씻으면 사라졌지만 어린시절 멋 부리고 싶은 욕구를 잠시나마 충족시켜 주는 데는 그만이었다.
오른쪽 화단 끝에는 장독대와 우물이 있었다.
장독대와 화단 사이에 오래 된 청포도 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시큼하고 달큰한 청포도가 주렁주렁 열리곤 하였다.
어머니는 비오는 날도 확돌을 사용할 수 있었다.
확돌이 포도나무 밑에 있었던 것이다.
포도나무를 지탱하기 위해 튼튼한 나무기둥을 중간 중간 세우고 얽어놓은 굵은 철사줄 사이에 우산을 끼우면 우산을 손에 들고 있지 않아도 되어 비오는 날 확돌을 사용해 무엇인가를 갈아야 할 때는 그만이었다.
포도나무가 끝나는 곳, 담장 곁에는 담장 높이보다 키가 큰 앵두나무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밑으로 난 잔 가지는 잘라버리고 앵두나무를 위로 키웠다.
담장 높이보다 올라간 곳에서야 비로소 잔가지를 뻗은 앵두나무는 마치 채반 모양을 하고 있었다.
봄이면 화사한 앵두꽃이 담장 너머로 집으로 돌아오는 가족을 가장 먼저 반겨주곤 하였다.
할아버지는 나무에 철사를 감거나 철사로 묶어 잡아당겨 신기한 모양을 만들길 좋아했다.
사철 나무, 향 나무, 소나무..., 무슨 나무든 할아버지 손이 닿은 나무들은 여늬 나무들과는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다.
장독대 뒤로는 오죽이 있었다.
다른 대나무들과 달리, 키가 크지 않았다.
키가 작고 굵기도 어른 엄지 손가락 굵기 밖에 되지 않았다.
학교에서 총채를 만들어 오라고 하면 총재 자루를 하기에 꼭 알맞은 굵기였다.
우리 집 오죽 나무는 우리가 다니던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즐겨 사용하던 가르침 대 겸 사랑의 매로도 사용되었다.
그 초등학교가 처음 세워질 때 설립 위원이기도 하였다던 할아버지가 선물한 모양이었다.
오죽나무와 장독대 사이엔 조그만 딸기 밭이 있었다.
간식거리가 흔치 않았던 우리는 딸기가 빨갛게 익기를 기다릴 여유가 없어 그 딸기는 빨갛게 익은 것을 보기가 드물었다.
딸기 밭 옆에 무더기로 피어나던 상사화도 아름다웠다.
봄이면 난초 잎새 비슷한 잎이 쑥쑥 올라왔다.
유월 쯤이면 그 잎새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아무 것도 없는 것 처럼 보이던 그 것에서 늦 여름이면 연보라색 꽃대가 올라와 나리꽃 처럼 생긴 꽃을 피웠다.
그래서 그 꽃의 이름을 상사화라고 한다고...
잎과 꽃이 서로 볼 수가 없어, 잎은 꽃을 그리워하다가 죽고 꽃은 잎을 그리워하다가 죽는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그 꽃을 집안에 두는 것을 꺼린다고도 하였다.
꽃말이 근심이라고...
동쪽의 채마밭과의 경계였던 울타리를 따라 서 있던 열 세 그루의 산수유도 잊을 수가 없다.
봄이면 제일 먼저 그 노란 꽃망울을 터트려 봄소식을 알렸다.
가을이면 빨간 열매가 꽃 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울타리 밑으로 인동 넝쿨이 벋어나가고 금은화라고도 불리던 노랗고 하얀 인동꽃이 필 때면 질식할 만큼 강한 향기를 뿜었다.
인동 덩쿨 옆에는 키가작은 가시나무 관목인 골단초가 있었다.
조금 길쭉한 콩꽃 모양을 한 노리끼리한 꽃을 따 먹으면 달큰하였다.
그 꽃을 넣고 떡을 찌기도 하였다.
그 옆에는 주머니 같기도 하고 초롱 같기도 한 꽈리가 어린 나를 유혹하곤 하였다.
꽈리 주머니를 찢으면 그 속에 동그랗고 노란 꽈리가 예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 것을 떼어 탱자나무 가시로 살살 달래어 씨를 빼 먹으면 달큰하기고 하고, 시큼하기도 하고 쌉쌀하기도 하였던 것 같다.
씨를 빼내고 물에 씻어 입에 넣고 다니며 꽈리를 불고 다니면 신이 났다.
골단초 나무를 지나면 뒤란이었고, 다른 시골집에 비해 넓었던 뒤란에는 감나무들이 있었고 그 밑에선 흰색 봉숭아가 해마다 꽃을 피웠다.
집을 돋우어 짓고 가장자리에 빙둘러 돌을 둘렀는데 그 돌틈에선 애기 똥풀이 노란 꽃을 피웠다.
애기 똥풀을 꺾으면 하얀 진이 많이 나왔다.
할아버지는 어느 한 구석 빈 자리로 두는 법이 없었다.
하루종일 그늘이 지는 뒤란에는 그늘에서 잘 자라는 애기 똥풀을 빙 둘러 심어 두었던 것이다.

사립문 오른쪽에서 뒤란까지 대충 돌았으니 이제 왼쪽 화단을 빼 놓을 수 없다.
대문 가까이에 있던 것은 설토화였다.
수국의 일종인데 수국은 풀꽃에 가까웠지만 설토화는 키가 어른 키보다 살짝 큰 나무였다.
초여름이면 무수히 많은 조그만 흰꽃들이 모여 농사꾼 밥그릇 보다 큰 꽃송이 하나를 이루곤 하였다.
꽃이 만발할 때면 그 커다란 꽃송이들이 무거워 나뭇가지가 땅에 닿을 듯 늘어지곤 하였다.
꽃이 질 때면 눈이라도 내린 듯 꽃 나무 밑이 햐얀 꽃잎으로 수북하였다.
그 옆에 모과나무는 나무 줄기 껍질이 벗겨지면서 만들어지는 모양이 아름다웠다.
꽃이 화려한 것은 아니었지만, 서리가 내리고 잎새가 지고 난 후 나무에 매달린 뽀얀 모과들은 꽃보다 아름다웠다.
한 발자욱 집안으로 옮기면 진달래 나무가 있었다.
산에서 자라는 진달래와 달리 할아버지가 몇년을 정성들여 가꾼 진달래는 밑둥이 굵고 키가 어른 키만 하였다.
꽃이 피면 벌들이 무수히 모여들었다.
윙윙거리는 벌 소리를 들으면서 따스한 봄빛 속에서 진달래 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이 온통 분홍빛 감도는 꿈결처럼 느껴지곤 하였다.
진달래를 지나면 연꽃이 있었다.
연못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적은 시멘트 사각통이 땅에 묻힌 것이었지만 그 안에서 해마다 연꽃이 피고 지고 연잎 사이로 빨간 금붕어가 꼬리치며 헤엄치고 다니기도 하였다.
연꽃이 지고나면 꼭 도토리 모양으로 생긴 연실을 연밥 속에서 빼내어 먹는 재미도 빼 놓을 수 없는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
맛은 밤 비슷하였지만 그 아름다운 연꽃이 지고 생긴 열매라고 생각하면 더욱 맛있게 느껴졌다.
그 조그만 연못을 지나면 모란이 있었다.
빨강에 가까운 짙은 분홍빛 꽃은 바라보는 사람을 빨아들이기라도 할 듯 강렬하고 고혹적이었다.
이렇게 하여 꽃밭을 통과하여 왼쪽으로 돌면 장미며 국화들이 있었고, 가장자리 돌틈엔 양달개비가 짙은 잉크색 꽃을 끊임없이 피워내고 있었다.
화단을 따라 돌아 다시 담과 이어지는 곳엔 소나무가 서 있고 소나무 앞엔 다른 곳보다 큼직한 돌이 놓여 그 곳에 앉아 쉴 수도 있었다.
소나무를 지나 화단 안쪽으론 담에 기대어 개나리가 있었다.
봄이면 잊지 않고 담장 너머로 노란 꽃을 피우며...

오른쪽 왼쪽 할 것 없이 나무들 사이사이 풀꽃들이 철따라 꽃을 피웠다.
주머니꽃, 작약, 옥잠화, 붓꽃, 과꽃, 맨드라미, 채송화, 봉숭아...등등
가난했어도 항상 부자였다고 느낄만큼 내 어린 시절을 풍요롭게 했던 그 정원이 눈에 삼삼하다.
할아버지가 가꾸셨던 그 아름다운 정원을 나도 가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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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방에 올렸던 글을 옮겼습니다.
계속 쓰고 싶은데 에세이 방이 꽁트 방보다 글의 성격에 좀더 어울릴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