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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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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만의 친구와의 대화(3)


BY agadacho 2001-02-10

고3때 점심시간에 교실에 날아든 파리를 읽던 소설책으로 탁! 치니 파리가 짹 소리도 내지 못하고 피식 책상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납작콩 빈대떡이 되어서... 뒤이어 일제히 아이들이 "뭐야?" 깜짝 놀란 목소리로 일제히 나의 쪽을 응시했지... 그냥 까?R없이 가슴이 부글부글, 삶 전체에 대한 분노, 그 화풀이를 힘없는 파리에게 한 셈인가?

광자야, 고3 1학기 초반, 그 때 새로 부임하신 남자 교장선생님께서 월요일 조회시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지~ "지금 모인 우리 학생들 중에는 집안 사정으로 대학에 진학하기가 어려운 학생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창피하다고 혼자 속으로만 끙끙 앓지 말고 조용히 교무실로 와서 담임에게 이야기하여 주면 적절한 취업교육을 시킨 후 취업은 100% 책임지겠다"

전교생이 720명이나 되던 당시의 우리 동창들 대다수는 당연히 대학으로 진학을 하였지. 그 남자 교장선생님은 소외된 소수의 고민을 어떻게 헤아리셨는지 몰라. 그래서 모인 학생이 딱 10명~ 모두 가슴에 풀어지지 않는 응어리를 하나씩을 쌓아두고 있는 아이들었지~ 방과후에 조용히 한 교실에 모여 우리는 타자, 주산, 부기 뭐 그런 것들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대부분 이 분야에는 적성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마음이 없어서 그런지 교육은 흐지부지... 드디어 우리를 교육하기 위하여 밖에서 초빙되어 오신 이 회계사 선생님 왈~ "정말 이 학교 학생들 맞는 거야?"

1학기가 끝나가는 여름방학 전, 우리 반에서 취업을 희망하는 단 1명이던 나를 다른 반의 지원자보다 먼저 취직시키기를 열망하는 담임선생님의 극성으로 내가 제일 먼저 M일본상사에 면접을 하러 가게 되었단다. 그런데 하필 당시 유행하던 결막염에 걸려 하얀 안대로 한 눈을 가리고 명동에 있는 그 회사에 면접을 하러 가게 되었단다.

가보니 그 부서에 우리 고등학교 2년 선배 언니가 이미 일을 하고 있었고 그 언니의 세심한 배려로 몰래 같다 준 영어 사전을 보면서 한영번역, 영한번역을 하고는 집으로 왔단다. 며칠이 지나자 이 번 여름방학부터 당장 일을 시작하였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지만, 생각 깊으신 우리 교장선생님이 학창시절이란 한 번 지나가면 다시는 오지 않는 것인데 2학기가 끝나고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안된다고 못을 박으시는 바람에 그만 주저 앉고 말았지...

당시는 그저 안되는 모양이다, 좋을 것도 싫을 것도 없이 무감각하게 받아 들였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얼마나 고마우신 사려 깊음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단다. 하여 그 회사는 포기하고 있었는데 2학기 겨울방학이 시작될 무렵 우리 담임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부르셔서는 "그 때 그 일본 회사, 이미 다른 학생을 채용했을까?" "그랬겠지요, 필요한 사람의 자리가 비어 있던 상태고, 굉장히 업무가 바쁘게 느껴졌는데요~" "그래도 우리 한 번 전화해 볼까?"

하여 그저 확인이라도 한다고 그 회사에 전화를 했더니 너무나 반가워하면서 아직 사람을 쓰지 않고 나의 겨울방학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야~ 세상에 완전히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 이지? 그래서 겨울방학을 하고는 나는 바로 그 시절 그 입기 힘들던 사복을 언니와 함께 시장에 가서 새로 하나 사입고는 출근을 하였단다.

첫 출근날, 다른 친구들은 막바지 대학 준비에 정신이 없는데(당시는 각 대학별, 과별로 본고사를 봤었잖아~) 나 혼자 일찍 취업 전선에 뛰어 든다는 것이 별로 기분이 좋지를 않아 후지글한 마음으로 버스에서 내려 명동길을 걸어가는데, 같이 취업 준비를 하던 한 녀석과 길에서 만난 것이야~ 그 녀석도 첫 출근을 하는 것이었단다.

지금 이 녀석은 남편이 상해에서 일을 하는 관계로 딸은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놓고 남편따라 상해에 가서 중국중의대에서 뒤늦은 한의학도의 길을 걷고 있단다. 이 녀석의 집은 우리보다 더 어려웠던지 새로 사복을 사 입을 형편도 안되어 친구의 옷을 빌려입고 첫 출근을 하였는데...

그 다음주부터 이 녀석과 나는 새로운 사회생활의 관문을 통과하는 의례식으로 첫번째로 택한 것이 '맥주마시기'였단다. 우리 둘은 첫날부터 가볍게 생맥주 1000cc로 시작하여 횟수를 거듭하면서 1500cc, 2000cc, 2500cc 이렇게 음주량을 늘려갔단다. 졸업하기도 전이지만 하루는 당시 유행하던 디스코텍에도 가보야 한다고 회사근처의 디스코텍을 갔는데, 그 곳에서 고등학교 특별반에서 같이 활동을 하던 선배언니를 만난 것이야~ 이 선배 언니왈! "야, 니네들 너무 빠른 거 아니야?"

그래, 광자는 본인이 악착같이 노력하고 어머니가 세심한 뒷바라지를 하신 덕분으로 S의대에 아주 좋은 성적으로 합격을 하였었지~ 과수석이었던가? 진심으로 자랑스러웠고 나의 일처럼 기뻤단다. 너의 합격 인사로 학교 선생님들 몇 분을 모신 자리에 주책도 없이 나도 따라가서 어떤 경양식 집에서 처음으로 '칼질'이라는 것을 해 보았었는데 생각나니?

생각해보니 내가 은근히 너를 귀찮게 한 일이 많았던 것 같다.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