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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대화 - 스승의 날에


BY 1004bluesky1 2001-11-03

어떤 대화 - 스승의 날에

"이게 뭐에요?"
"오늘이 로즈데이거든요.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장미를 주고받는 날."
"그래요? 날도 참 많네요. 저도 하나 만들어야겠네요."
"그럼 좋죠. 우린 또 팔고."
"저도 하나 주세요."
"남편이 사 두었데요?"
"왜요? 안 사두었을걸요. 그 사람은 아마 그런 거 모를걸요."
"그럼 관둬요. 서로 줘야지."
"혼자 주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어요?"
"아니, 그냥 성질 나잖아."
제일 싱싱한 걸로 하나 골라 학원으로 올라왔다.
"이게 뭐에요?"
"문구사에 갔더니 오늘이 로즈데이라고 해서 말이에요."
"선생님은 정말 아직도 신혼처럼, 연애하는 것처럼 사시네요."
"결혼이란 거, 사랑이란 거 어차피 계속 가꾸어 주어야만 하는거잖아요? 길지도 않은 삶인데 재미나게 행복하게 살아야지요. 아마도 제 남편은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겠지만요."
영롱한 물기를 머금은 장미 송이를 내려보며 전화를 건다.
"오늘 일찍 와요? 늦어요?"
"응, 왜?"
"일찍 오면 일찍 가고 늦게 오면 늦게 가려고."
"일찍 와, 그러면 나도 일찍 갈게. 생일인데 맛있는 거 해먹자."
쇼핑센터에 들러서 싱싱한 낙지 세 마리와 쇠고기 로스를 샀다. 상큼한 깻잎도 잊지 않고.

"자기야! 이거."
"이게 뭔데?"
"오늘이 로즈데이래 그래서 하나 샀어."
"응? 난 그런 거 모르는데. 그럼 난 이걸루 줄게."
종이 위에 쓱쓱 장미 한 송이를 그려놓고, 그 위에 하트를 그리고 사랑해 라고 쓴다. 가슴속에 은은히 사랑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생일 축하해요. 생일인데 맛있는 낙지 볶음이나 해먹을까?"
"좋지. 하지만 오늘은 물도 안 나오고 당신 생일이기도 하니까 내가 요리해 줄게."
컴퓨터 앞에 붙어 앉아 있던 그가 벌떡 일어나 고무장갑을 끼고 주방으로 들어온다. 미끈미끈 미끄러지는 세발 낙지와 한바탕 씨름이 벌어진다.
"나야, 뭐. 내 맘대로지만 아래 위 사람 눈치보느라고 힘든 자기가 진정 축하를 받아야지."
"아니야, 난 선생님 대우는 받지만 당신은 모든 일에 책임을 져야하고 가르치면서도 돈을 위해 일하는 사람 같은 취급을 받으니까 나보다 열 배는 더 힘들잖아. 그러니까 당신이 더 대우를 받아야지."
"오늘 아름이 수업에 가보니까 초롱초롱한 86개의 눈동자들을 한꺼번에 받으면서 수업하는 재미도 괜찮을 것 같던 걸."
"그래, 그게 바로 교사로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닐까 해."
"나도 그래. 내 얘기만 기다리는 아이들의 눈동자를 맞추고 있으면 무한히 행복해지니까."
"그게 바로 다른 모든 스트레스를 견디고 교사 생활을 하게 만드는 힘이지."
"맞아요. 우리 서로 우리의 생일을 축하해요. 그리고 아름이 선생님께도 편지를 드려야겠어요. 생신 축하한다고"
"그래. 앞으로도 10년, 아니 20년 우리 이렇게 살아. 서로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고, 누가 뭐래도 내 맘을 제일 잘 아는 건 당신이니까."
"그래요. 우리 이대로 영원히 행복하기로 해요. 사랑해요."
스승의 날에 먹은 낙지볶음!
그 맛은 정말 잊을 수 없는 달콤함이라고나 할까?
(여러분도 한 번 드셔 보실래요? 그럼 선녀와 나무꾼의 집으로 오세요.)

역시 그건 이루기 어려운 꿈이었다. 한순간의 달콤함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
그는 장미를 내민 내 손이 부끄럽도록
"이게 뭔데."와 "별 희안한 ..."
이란 여운으로 내 기대를 깡그리 부셔버렸다. 그리고 음식을 준비하는 두어시간 내내 컴퓨터 앞에 붙어 앉아서 성찬을 기다리는 대왕마마의 거만함과 당연함으로 일관했다.
잠자리에 들며 팍 구겨진 기분을 억지로 추스리며 그래도 생일 축하한단 말을 하고 싶어서 운을 뗐다.
"자기야, 있잖아."
"아, 왜? 피곤하고 잠도 안 와서 죽겠는데."
난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더 이상은 더 이상은 더 구겨지고 싶지 않아서.
'얼마나 더 살아야 너와 나의 마음이 서로 맞닿아 살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정녕 오기는 올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