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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코뚜레


BY ns05030414 2001-10-28

봄은 사방에서 무르 익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봄 나들이 소식을 들으며 여편도 가고 싶었다.
남편도 회사 동료들과 일 요일에 봄 나들이를 간다고 하였다.
등산화도 사고, 입고 갈 옷도 사고, 준비를 하는 남편을 지켜 보면서 여편은 부러웠다.
봄이면 파랗게 변해가던 고향 들판이 떠올랐다.
이름 모를 온갖 풀꽃들도 눈에 삼삼했다.
품안으로 파고 들던 향기로운 바람도 그리웠다.
"나도 아이들 데리고 따라가면 안 될까?"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 여편은 실 없는 소리를 해 본다.
"남자들끼리 가는 데 어딜 따라 온다고......"
남편은 언성을 높이며 얼굴을 붉혔다.
'그냥 해 본 소린데 뭐 그럴 것까지야...'
말은 안 했지만 여편은 섭섭하다.

결혼하고 오 년을 살도록 여편은 남편과 함께 놀러 가 본 적이 없다.
해 마다 휴가는 이렇게 보냈다.
시집에 가서 시어른 들에게 아이들 재롱 보여주고,
여편은 밥하고 설겆이하고 청소하고,
남편은 누워서 빈둥 거리며 텔레비젼 보고......
그래도 여편은 불평이 없었다.

일요일 아침 높은 산에 등산이라도 가 듯 요란한 차림으로 집을 나서는 남편을 배웅하며 여편은 울고 싶었다.
봄날의 시골 풍경이 다시 눈에 아른거렸다.
보라라고 해야 할 지, 분홍이라고 해야 할 지, 망설이게 하던 과수원의 복숭아 꽃...
꽃 보다 더 아름다운 빛깔로 피어나던 버드나무 늘어 선 신작로...
산 모룽이 밭에 피던 노란 유채 꽃, 보라색 흰색이 섞여 피던 장다리 꽃, 둥글고 하얗던 파 꽃...
나물 바구니는 건성으로 들고, 들로 산으로 헤매고 다니며 봄을 즐기던 여편 자신의 모습까지...
다음 일요일엔 김밥을 싸 들고 아이들 손 잡고 집 근처 도봉산이라도 찾아보겠다고 여편은 마음을 정했다.

다음 일요일 여편은 김밥을 쌌다.
남편은 피곤하다며 집에서 텔레비젼이나 보겠다고 했다.
남편에 대한 섭섭함을 여편은 밀쳐냈다.
많이 섭섭할 것도 실은 없었다.
남편과의 적지 않은 세월동안 여편은 터득하고 있었다.
기대할 것과,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남편의 머릿 속에는 가족과의 나들이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여편은 세 살, 네 살, 두 아이 손 잡고 혼자서 도봉산에 가서 김밥 먹고 내려왔다.
남편은 온 종일 빈둥거리며 누워서 텔레비젼을 보았다.
모처럼 아이들 없는 일 요일을 즐겼다.

며칠 후 남편은 사진 몇 장을 들고 왔다.
봄 나들이 때 찍은 사진들이었다.
사진 속에서 사람들은 즐거운 게임을 하며 놀고 있었다.
밝고 환한 웃음을 웃는 사람들이 보기 좋았다.
음식을 먹는 장면도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일까?
남편은 웃고 있었다.
남편의 표정으로 미루어 무척 재미있는 이야기가 오고 간 모양이었다.
그 사진 속엔 이런 사람들도 있었다.
배가 부른 여자, 아이 손을 잡고 있는 여자, 자기 남편과 다정히 서 있는 여자...
여자는 많이 있었다.
아이들도 많이 있었다.
"아니, 여보, 당신 이럴 수가?"
남편은 그 때서야 '아차!'하는 표정이었다.
미안해 하는 남편을 보면서 여편은 참았다.
이미 지난 일이었다.
지난 일 보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이었다.
여편은 알았다.
이 사진이 남편의 코뚜레가 될 것임을...
여편은 사진을 소중히 간직해 두었다.
앨범 속에, 그리고 마음 속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