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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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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가을걷이


BY dansaem 2001-10-22

어제는 그가 일년 내내 고생해 가꾼 벼를 수확했습니다.
볍씨를 담그고 못자리를 하고 모를 심고 여기까지는 남들과 같습니다만
그 다음부턴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이었지요.

결혼하기 전부터
'난 농사를 지을 테니, 넌 하고 싶은 일을 해라.
남자가 농사를 짓는다고 꼭 같이 해야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농사일이 체력적으로 여자들에겐 힘든 일이다.'
라고 했던 그 말이 아직까지는(?) 잘 지켜지고 있습니다.

농약을 안 치고 농사를 짓는다는게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인지...
전 들일은 거의 안 합니다만 옆에서 볼 때 안스러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지요.

여름에는 새벽 4, 5시면 동네가 부산합니다.
이 집, 저 집에서 들에 나갈 준비를 하느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소리,
부지런한 경운기 소리가 새벽잠을 깨우지요.
그 사람도 그 시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들로 나갑니다.
저요? 전 물론 잡니다.
애들요? 물론 자지요.

모두들 들로 나가고 동네가 조용한 시간에 겨우 일어나서 아침밥을 준비하고
큰 아이 깨워서 유치원 갈 준비를 시키고
밥 먹여서 데려다 주고...
대개 9-10정도면 그가 들어오지요.
급히 씻고 밥먹고 출근합니다.
그리고는 오후 5시 정도면 퇴근하지요.(좋은 직장이지요?)
그럼 옷만 갈아입고 배 좀 채운 다음 다시 들로 나가지요.
그리고는 어두워져야 들어오니까 9시는 넘어야지요.
그리고는 밥먹고 잡니다.

그런 생활을 여름 내내 했어요. 살이 8kg나 빠졌었죠. 요즘 덜 바쁘니
다시 조금 찐 것 같아요.

제일 힘든 게 바로 '풀과의 전쟁'입니다.
몇천원 짜리 제초제 한병이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사람 손으로 하자니...
뽑고 돌아서면 다시 자라있는 풀, 한 여름의 뜨거운 태양을 먹고 쑥쑥,
다른 어떤 농작물보다 빨리, 크게 자라는 풀! 풀! 풀!
아무리 가물어도 풀은 자랍니다. 아무리 장마가 져 야채들이 녹아내려도 풀은 자랍니다.
오죽하면 잡초같은 생명력이라 하겠습니까?
그 풀을 잡겠다는 게 우습지요?
그래서 그는 어느 정도는 포기를 한답니다.
흙에서 풀이 나는 건 당연한 일이라구요.
하지만 동네 중간에 있는 밭을 온통 풀밭으로 만들어놨으니
동네사람들한테 한마디씩 인사를 듣는 것은 감소해야 할 일이었지요.

유기농에서 제일 금기시 하는 것이 바로 제초제 입니다.
풀을 말려 죽이기도 하고 아예 안나게 하는 약도 있다 하더군요.
베트남전에서 사용된 고엽제가 바로 그 제초제 성분이라 하는데
몇십년이 지난 지금도 고엽제 피해로 힘겹게 살고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유전도 된다던가요?-
그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두말도 필요없겠지요.

하여간 스스로 자초한 풀과의 전쟁에서 그는 적어도 무승부는 한 것 같습니다.

모를 심고나서 우렁이를 사다 넣고 그위에 쌀겨를 뿌려
풀을 기선제압하려 했던 작전이 실패하고 나서 아침 저녁으로 논에 가서 살았건만
사무실 일과 겹쳐서 시기를 놓치고 나니
(논은 시기를 놓치면 풀도 맬 수가 없답니다.
벼가 자라서, 엎드리면 눈을 찌르기 때문이지요.)
3분의 1은 그냥 풀밭이 되어 버렸지요.
중간에 병도 약간 있었고 해서 그의 말로는 남들 수확량의 절반정도라고 하더군요.

한번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그가 안스러워 논메기를 자처해서 따라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꺼번에 4골씩 나가고 저는 2골씩 나가니까 진도가 맞더군요.
겨우 2시간 정도 했습니다.
목도 마르고 허리도 아프고 잠시 엉덩이 붙일 곳도 없고...
밭이라면 엉덩이 뭉게고 앉아서 잠시 쉬기도 하련만.
그게 무슨 도움이 되었겠습니까만 위문공연 차원으로 폼만 잡아봤을 뿐.
옆에서 종알종알, 심심하지만 않았어도 성공이지요.

어제는 타작까지 끝냈으니 속이 시원하다면서
오후에는 낮잠도 자고 맛있는 거 해달라고 유세도 부립디다.
그 동안 고생했다며 입에 발린 소리도 해 가며
집에 있는 감자, 고구마, 양파, 당근을 채썰어 야채튀김을 만들어 주었더니
아이들이랑 셋이 앉아 몇 접시나 비우고는
"엄마는 요술쟁이야. 뚝딱뚝딱 하니 이렇게 맛있는 요리가 나오잖아, 그지?"
하며 밉지 않은 애교(?)를 떱니다.

우리 집은 정말로 그가 식구들을 먹여 살립니다.
요즘에는 밥상에 사서 먹는 게 거의 없을 정도랍니다.
총각김치, 고들빼기 김치, 감자조림, 깻잎김치, 파절이, 파전, 된장찌게,
그리고 어머님이 해 주신 도토리묵 - 이런 것들이 요즘 우리 식단을 차지하지요.
식탁의 자급률이 높아질수록 그 사람의 만족도도 높아지지요. 아주 흐뭇해 하거든요.
그 사람의 수고로 우리 아이들에게 건강한 생명의 먹거리를
마음껏 먹게 해 줄 수 있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또 그에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아기 때부터 현미밥과 된장찌게에 익숙해진 우리 아이들,
식사 때 아이들 반찬을 따로 만들지 않아
총각김치 하나로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워내는 우리 아이들,
그래서 병원갈 일 별로 없는 아이들이 새삼 고맙습니다.

많지는 않아도, 비싸거나 좋은 것은 아니어도
우리 집에 다녀가는 사람들에게 한 보따리씩 싸 주는 건 참 즐겁습니다.
그에게 미리 허락 받았지요.
나의 노동은 들어가지 않았지만 당신이 농사지은 것들
내 맘대로 퍼 줘도 되냐구요.
물론 그는 허락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하고 싶다는 거 못하게 한 적은 없거든요.
사실 그랬다간 호랑이같은 마누라한테 무지 혼나거든요.

가을비가 청승맞게 오는데 그냥 두서없이 주절거려 봤습니다.
비가 그치고 해가 쨍쨍 나야 되는데...
나락 말려야 되거든요.

모두들 행복한 가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