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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끝자락에서 행복을 보다[3]


BY 더기 2001-01-06

결국 해를 넘기고 말았다.
스스럼없이 옷을 벗기에는 아직 남은 가식의 때가 깊었고 왠지 글을 다쓰고 나면 예전처럼 여기 머물수 없을 것 같아서.....
병원 생활을 쓰려다 벽에 부딪쳤다.
2년도 지나지 않은 일인데, 내 삼십년 보다 길었던 석달인데 도무지 뿌여니 아득해서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마치 한번 훑어 본 소설마냥 분명한것은 하나도 없다.
망각은 나를 지탱한 힘이기는 하나, 깊은 수렁에서 나온자 빠져나와 편한 생활에 안주한 결과인거 같아 가슴 아프다.
평생을 두고 저주하고프던 의사의 이름도 병실 날짜 같은 숫자도 어쩌면 그모든게 실제 있었나 싶게....
바로 손을 뻗치면 병상일지가 있지만 도저히 꺼낼수 없다.
늙은 창녀처럼 아무 목적도 없이 그저 습관처럼 몸을 파는 그런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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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3월 .

이대로 주저 앉을 수는 없었다.

나 이렇게 불행하니, 내상처를 핥아 달라고 널브러져 있기엔 남은시간

이 너무 길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이들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공사를 마무리 짓고 준공을 따고 융자를 내고 직업훈련을 다니고...

하루를 열흘같이 보냈다.

'불행아 더 있으면 덮쳐라!'악악 대가며 인생 따윈 내가 개척할 수

있다고 호언했다.

그무렵 아이들은 감기를 달고 살았다.

어느날 밤 너무 순해 별로 운적이 없던 작은애가 10분 간격으로 울어

대기 시작 했다. 잠이들었다가도 악 하는 비명과 함께 자지러지게 울

어 댔다. 알수 없는 불안이 엄습했다.물론 남편은 집에 없었다. 들어

오지 않는날이 더 많았으므로...119에 전화해 수원쪽 대학 병원으로

향했다. 큰아이때문에 집에 남은 엄마가 울고 있었다. 별일아닌데 운

다고 짜증을 내면서도 외면해도 자꾸만 찾아드는 불길함에 더럭 겁이

났다. 병원에 도착한 아이는 낯선 주위에 놀라서인지 생글거리기까지

했다. 아이가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니까 20개월짜리가 그런 의사 소통

이 되냐고 되묻는다.

"토해요? 아님? 열도 없네 ! 원하면 CT찍어드리구요.아님 돈 안내게

처리해 드릴께 집에 가세요."

내 행색을 보니 이해가 갔다. 너무도 초라하고 서러워 남편에게 전화

를 했다. 예의 소라샘이다. 녹음을 했다.떨리는 소리로..

"여보,응급실인데... 나 너무 두려워 와줄수있어? 아기가 많이 아파!"

응급실 한켠에 아이를 안고 쭈그려 앉아 전화를 기다렸다.

아침이 왔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는길에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아이가 아프다는데........

내가 보낸 메세지는 확인조차않았을 남편을 생각하며 오기가 생겼다.

별일 아닐꺼야 !

그리고 또 며칠을 흘려 보냈다.

다니던 동네 병원에 가니 엄마가 잘 돌봐주면 ?I찮을 꺼라고....

엄마 생신과 큰아이의 소풍이 겹친날 모처럼 온가족이 외식을 했다.

응급실 사건이후 조금 부드러워진 남편과 갈비도 먹고 집에 와서 조촐

하지만 파티도 했다.

아가가 그렇게 고기를 많이 먹는걸 처음 봤다.

실낱같이 행복을 갈망해 보았다. 유난히 엄마를 밝히는 우리 아가 맘

만 있었지 아무것도 해준것 없는 우리아가 !

유치원 간 언니를 마중나가면 마냥 좋아라 했다.

그러다 아이에게 이상을 느낀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였다.

자꾸만 물건을 헛짚는게 이상해서 구슬을 흩어 놓고 잡으라 하니 딴전

을 피운다. 낯선 물건을 알아보지 못했다. 집안에 기존에 있던 사물

은 다 외우고 있었던것이다. 큰아이가 유치원서 받아온 달력에 있던

뱀그림을 보고 아무셔 하며 애교를 떤다. 해가 바뀐지 오래라 떼어 버

렸는데....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침대에 누우면 엄마 안보

여 하며 얼굴을 갖다대서 제쪽을 보라는 어리광인줄 알았는데...

지금에 와서도 그때 그 어린것이 무슨 맘으로 그 오랜 시간을 보이는

척 했는지 알지 못한다. 이미 알고 있어 평범한 일상을 조금더 함께

하고 싶었던걸까?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겨우 병원 마감시간에 맞춰 동네 소아과를 들렀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기더니 설명을 듣고 동공을 비춰 보고나서 ..당황하는 얼굴을

보았다. 종합병원 응급실을 다시 찾았다.설명을 하니 안과로 보낸다.

레지던트라는 남녀 셋이서 아이만 질겁을 시키더니 무슨근거로 아이

가 않보인다는거냐고 되묻는다. 훌쩍이는 아이에게 생수를 먹이니 생

수병 입으로 가져 가는걸 가르키며 비웃기 까지 한다.

눈이 보인다면 여기 있을 필요가 없으니 집에 가겠다고 했다.

보채는 것도 증상이라며 이번엔 가로 막았다. CT를 찍어 보라고 소아

과 쪽에서 콜이 왔다. 조영제 투여를 위해 사망시 병원에 책임을 묻

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병원에 있는동안 수없이 써야 했다.) 촬영

을 했다. 별일 아니리라 앞으로 잘키우라고 한번 겁주는걸꺼다.

신경외과서 내려온 의사가 무덤덤한 소리로 종양이 시신경을 눌렀단다

웃음이 나왔다. 꿈일꺼다. 왜 안깨지? ....그렇나 사흘을 밤을 세우도

록 꿈은 깨지않고 선명해 지기만 했다.

더높은 의사가 와서 다시 설명을 하고 재 촬영 ...울다 지친 아이를

들춰 업고 사진 설명을 볼때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종양이 너무

커서 두개골이 벌어졌다고 이렇게 되도록 몰랐냐고.....

응급실에 왔던 그날을 제외하곤 열이나보 보체지도 않는 아가였다.

수술결정은 학회에 나가 있는 자신의 은사가 와서 할것이라 했다.

애끊는다는 표현을 그때 알았다. 머리도 가슴도 아직 실감 못한 고통

을 몸이 먼저 알고 장이 끊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아가는 불러 놓고

자꾸 엄마 메롱 하며 가슴을 휘젓는다. 병원에 오고는 급격히 나빠져

아무것도 안보이는지 벽쪽을 보고 자꾸 집에 가자 하고,수술할까봐 급

식하라는데 쏘세지랑 우유 사달라고 안쓰던 떼를 쓴다.

할메와 언니를 찾아서 결국 두집에 다 연락을 했다.결국 수술결정이

나고...7시간의 야간 수술.

새 날이 밝았다. 수술은 기적적으로 잘 되었다고....

48시간을 어떻게 흘려 보냈는지 ... 살려만 달라고 내 모든걸 다 가져

가도 좋으니까 살려만 달라고...

아이는 중환자실로 나는 지하 3층으로 그렇게 생이별을 했다.

병원생활동안 가장 고통 스러웠던건 아이를 떼어 놓는 일이었다.

하루에 두번있는 면회시간 외엔 우는것 외엔 할일이 없었다.

나 혼자 덩그마니 남아 그리움과 죄책감에 눈이 떠지지않을때까지 울고 또 울고...

아가를 위해 할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화목하던 시댁 식구들로 부

터 함께 버림받는일 외에는.....

그때 내게 희망을 가르쳐준건 피를 나눈 형제도 가족도 아닌 같은 아

픔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나중에 소설한권은 쓸수 있을 거라며 웃던 지하3층 식구들 지금 어디

서 어떻게들 지내는지 궁금하다.

그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내게 감사하는 법을 배우게 가르쳐 주었던

너무나 따듯하게 날감싸 일으켜 주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