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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가을에 시작한 내 일


BY 雪里 2001-09-24

딱 두시간만 가게를 지키면 된다고 작은아들을 가게로 불러냈다.
값도 모른다는걸 월요일 이라 손님 없어 괜찮다며
"이건 이천원, 이건 삼천원,지렁인 천원..."
행여 손님 하나라도 놓칠까봐 이것저것 값을 알려준다.
"모르면 전화하구...."

오늘은 문화원 가는날.
신문지연습을 끝내고 화선지에 먹물을 처음 칠(?)해본다고 했다.
화방에 들려서 연습용 화선지를 사고 좀 두꺼운 스케치북도 한권 샀다.

허겁지겁 지하계단을 내려가니,
엄마들이 몇명 와서 연습을 하고 있다. 보통 솜씨들이 아니다.
난을 치는 사람,
산을 그리는 사람,
사진을 펴놓고 옮겨 그리는 사람...
습자지 펴놓고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써서 선생님께 제출하며
까만 먹물 묻은 손을 부끄러워 감추던게 전부인 나와는 수준이
안맞겠다는 생각에 주눅이 든다.

"붓에 골고루 먹물을 칠하구요, 물기를 걷게 한다음 이렇게..."
예쁜 아가씨 선생님은 쉽게도 선을 그려낸다.
먹물을 붓에 골고루 바르고, 농도검사를 한다음 한숨을 크게쉬고
나도 이~렇~게~.(으휴)
화선지는 먹물을 잘도 빤다.
산을 그리려는데 엿가락 늘려서 구부려 놓은것이 화선지위에
뭉뚝하게 놓여있다. (누가 볼까 무섭네)
"둥그렇게 하시지말고 선을 그리시는 거예요. 손의 강도로 굵기를 조절 하시면서 이~렇~게~~!"
"먹물은 한번 바른거로 여러번 쓰시면서 농도를 느껴보세요"

말은 알아듣겠는데 붓이 맘대로 되야 하지.
그리고, 또 그리고, 다시 또 그리고...
붓이 나쁜건가? 애초에 비싼걸로 살걸 그랬나?
화방 주인이 이만원짜리 사랄때 살걸! 만원짜리 샀더니만...
머릿속에선 별별 생각이 꼬리를 물고 지나간다.
산은 산이아니라 엿가락이고,
불편한 자리에 허리는 아프고... 그래도 오기가 있지!
올려서 그리다가 내려서도 그리고, 가늘게 굵게,많이 많이...

"많이 좋아지시네요!"
이나이에도 선생님의 칭찬이 그리 좋을까! "그래요?"

신명이 나서 붓에 먹물을 다시 바른다.
좋아진다니까 좋아서 또 더 많이 ,열심히 그려댄다.
오래 무릎을 꿇고 있으니까 저려서 자세를 바꾸니 무릎에서 "우드득"하는 소리가 난다.
"몸이 말을 잘 들어야 뭐라도 하지!" 하는 맘에 잠깐 속이 울컥 한다.
자세를 고쳐 앉으며 또 그리니
팔의 힘으로 선의 굵기가 가늠해지는 것을 조금 느낄 것 같다.

저만치 옆의 고수(?)들은 그럴싸한 산을 그려가고 있다.
나도 열심히 하면 저런 그림이 그려질까?
연습량에 따라 실력차가 나올거라는 예쁜 선생님의 말이 희망을 갖게 해준다.
이번 주말에는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많이 연습해서,
나도 산을 산같이 좀 그려 봐야겠다.

나를 끝끝내 깐보고 있는 그이에게 멋진 산수화 작품 하나를,
어깨에 힘주며 내보일 수 있을 그때가 언제일지 몰라도,
이가을에 시작한 이 일이 내 인생을 조금쯤은 빛 이게 할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