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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주부의 알.콩.달.콩 - 27. 시어머니의 그릇


BY 꼬마주부 2001-08-12

시어머니의 그릇.

우리 집 가스렌지 위에는 가스불에 얼룩이 진 작은 주전자가 하나 있다.
거뭇거뭇한 얼룩은 수세미에 아무리 힘을 줘서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다.
이 주전자가 처음부터 이렇게 얼룩덜룩 한 건 아니었다.
내가 이 주전자를 처음 봤을 때는 새로산 주전자 마냥 스텐레스 특유의 은빛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그 모습이 얼마나 깨끗하고 깜찍한지 나도 모르게 주전자의 손잡이를 불쑥 잡아버렸다.

"어머니, 저 이 주전자 주세요!"

이 주전자는 시어머니께 그렇게 얻은 주전자다.
어머니의 싱크대 위에서 은빛 반짝이며 얌전히 있던 저 작은 주전자.
어머니는 시댁에 갈 때마다 저 주전자에 물을 끓여 따뜻한 차를 내주셨다.
물이 보글보글 끓을 때마다 내 눈 앞에서 더욱 반짝여 보였던 저 작은 주전자를 갖고 싶었다.
어머니는 "그래." 하시며 망설임 없이 비닐봉지에 담아주셨다.

그러나, 우리 집 가스렌지 위에 올려져 있는 저 작은 주전자는 아무리 봐도 그 때 어머니의 싱크대
위에서 봤던 그 은빛 주전자가 아니다.
가끔씩 컵라면 물을 끓이거나 커피 탈 물을 끓였을 뿐인데도 주전자는 10년은 넘게 식당집에서 가스
불 위에 올려놓았던 것마냥 얼룩얼룩하다.

..........

결혼하고 3개월쯤 되었을까?
혹여 간섭이 될까 좀체로 우리 신혼집에 오시지 않는 시부모님께서 오랜만에 오셨던 날이다.
어머니께서는 장손 며느리인 나를 가만히 앉아 있게 하시고 빠른 동작으로 저녁을 차리셨다.
저녁 반찬은 고추장 불고기였는데 내가 만들었던 것과는 다른 맛이 났다. 감칠 맛이 돌았다.
식사 후 어머니는 설거지를 하는 내 옆에서 그릇을 휑구셨다.
"어머나, 이거 밑바닥이 깨졌구나."
"네?"
어머니의 눈길을 붙잡은 설거지통은 분홍색으로 움푹 파인 커다란 플라스틱 그릇인데 신혼집 꾸밀 때 어
머니께서 슬쩍 놓고 가셨던 그릇이다.
그릇은 반질반질하고 윤기가 났다. 새것이 분명했다.
오시다가 어디서 사은품으로 타오신 싸구려 그릇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리고 결혼하고 며칠 만에 깨졌다.
"이런...언제 깨졌니? 이거 튼튼한 건데 어떻게 하다 깨졌니?"
"....저...잘 모르겠어요."
키우던 강아지 다리가 부러졌을 때 어머니같은 표정이 나올까?
어머니의 안타까워 하는 표정이 진지하셔서 차마 뜨거운 물을 생각없이 붓다가 깨졌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이거 10년도 넘게 설거지통으로 쓴건데....예쁜 그릇이라서 고이 쓰다가 그릇보다 더 예쁜 며느리한테 주고 싶어 네게 준건데...붙여 쓸 수도 없고 아깝구나...."
10년을 넘게 쓰신 설거지 통이라는 말에 내 심장은 갑자기 마구 뛰었다.
10년을 매일같이 설거지를 담으시고 깨끗이 씻어서 말렸을 어머니의 움직임이 머리속을 맴맴 돌았다.
그런 그 그릇을 건네 받아 단 며칠도 지키지 못하고 깨뜨린, 그러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나는 얼마나 못난 며느리인지.....

주전자, 설거지 그릇 뿐만이 아니다.
어머니 손에 있는 물건들은 항상 반짝반짝 빛이 난다.
나무탁자 위의 전화기, 화장대 위의 손거울, 칠이 살짝 벗겨진 숟가락, 어머니께서 혼수로 가져 오셨다는 자개무늬 둥그런 밥상, 주름대로 접혀 있는 격자무늬 우산, 숫자가 안 보이는 계산기, 우리 신랑이 고등학생 때 선물로 드렸다는 작은액자....
그 물건들은 최소한 10년, 많게는 30년이 훨씬 넘은 것임에도 어제 산 물건 처럼 윤이 난다.
매일매일 필요이상으로 닦아내는 것도 아닌데도 어머니 손에 있는 물건들은 반짝거린다.
물론, 새로 산지 얼마 안되는 우리집 살림살이들도 반짝거리긴 한다.
하지만 그건 새 것의 빛이지 어머니의 물건들에게서 보이는 그런 빛은 전혀 아니다.
대체 이유가 뭘까?

어머니는 얼마 전, 나에게 옷 한 벌을 꺼내 주셨다.
"치마랑 조끼인데 입어보련?"
발목까지 내려오는 유행지난 긴치마와 촌스러운 조끼였다.
오래 된 옷이 분명했다.
그런데 옷은 잘 다려져 있었고 실오라기 하나 터지지도 않은 채 깨끗했다.
"어머니! 이건 또 언제거예요?"
"이거? 이게.....느그 신랑 낳고 입었던 옷이니까....30년 ?네."
"네???"
"왜, 엄마가 이렇게 날씬했던게 믿겨지지 않냐?"
"세상에, 어머니 대체 비결이 뭐예요? 30년이나 된 옷이 어쩜 이렇게 깨끗해요!"
"비결? 비결은 무슨........귀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 뭐, 물건이야 쓰면 닳긴 하지만 귀하게 생각하면 어디 그게 쉽게 닳아지더냐, 대충 쓰다가 새거 산다고 생각하면 2배로 더 빨리 닳아지는게 물건이거든. 내가 이거 끝까지 한 번 써본다, 하고 귀하게 쓰다보면 원래 수명보다 10배는 더 오래 가는 것 같더라."

내가 아무렇게나 내려 놓은 긴치마와 조끼를 곱게 개시며 어머니는 대수로운 일도 아니란 듯이 말씀하셨다.
그때 난 어머니 얼굴에서 반짝하고 빛이 나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태 내가 봤던 빛들은 물건에서 반짝였던 빛이 아니라 어머니의 얼굴에서 반짝인 빛이 물건들에게 반사된 것이었란 것을 알았다....

....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우리집에서는 3개월 된 날씬한 선풍기가 회전 기능이 고장난 채 윙윙 요란하게 돌아가고
시댁 거실에선 키 작고 투박한 신일선풍기가 12년 째 조용히 돌아가고 있다.
물론 반짝반짝 빛이 나면서 말이다.

꼬마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