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14세 미만 아동의 SNS 계정 보유 금지 법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679

과수원집 네째오빠


BY 들꽃편지 2001-01-12

고향엔 과수원을 가지고 있는 집이 단 한 집 있었다.
그것도 사과나무만 있는 과수원이였다.
사방이 산으로 들러쳐진 산골마을이였기에
논보다는 밭이 많았고 밭보다는 산이 훨씬 넓었다.
계단식논과 화전밭.
이런 척박한 곳에 과수원이 있다는 것이 희귀했고 귀중했다.
어릴적에 과일이라고 접할 수 있는 것은 뒷뜰에 있는 앵두와 대추.
산어저리에 있는 개복숭아와 또랑가에 있던 머루.
뽕나무 열매 오디가 전부였다.
사과나무가 있던 과수원집은 나의 외갓집에서 제일 가까운
이웃이었고,냇가를 가려면 과수원길을 질러서 가야했다.
사과나무는 키가 그리 크지 않았다.
사과는 내 손을 뻗기만 하면 곧바로 딸 수 있는위치에서
여물어 가고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뒤뜰에 있는 앵두도 아니였고
임자가 없는 뽕나무도 아니였다.
빤히 처다 보기도 겁나는 열매였고
함부로 건드려 볼 수 없는 하늘같이 높은 열매였다.
그러나 그 과수원밭에 눈치볼 거없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계절이 있었다. 봄과 겨울.
봄...유달리 과수원밭엔 나물이 많았다.
거름이 풍부했고 햇볕도 풍족하게 내려올 수 있는 양지쪽이여서
그런지 나물이 뜯어도 뜯어도 그대로 였다.
으음~~뽀시시한 꽃과 향긋한 내음.
난 과수원을 갖고 있는 그 집 오빠들이 마냥 부러웠다.
남자들만 다섯명, 딸은 한 명도 없었다.
외갓집은 딸이 다섯. 아들이 겨우 한 명인데....
그 오빠들중에서 나보다 한 살 많은 네째 오빠를 괜히 좋아했었다.
이유도 없고 근거도 없고 발전도 없이 과수원집 아들이고
나와 나이가 제일 비슷했고 그 오빠가 제일 순진해 보였다.
왜냐하면 다른 오빠들은 내게 말도 걸고 날 보면 아는척도 하는데
이상하게 네째오빠만은 날 보면 외면을 하고 피하듯 보여서 그런지
순수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겨울...이 계절의 과수원은 텅 비어 버린다.
썩어 비틀어진 사과나 크다만 사과가 보기 흉하게 달라 붙어 있던
나무.바람만 어지럽게 불던 과수원 길.
눈이 허리까지 차오르면 과수원길은 아예 갈 수 없는 먼 땅이
되고 만다.그 길은 우리 외갓집 식구와 과수원집 식구들외엔
아무도 볼일이 없는 길이기에 눈이 무식하게 쌓이던 날부터
얼마간은 다른길로 돌아서 냇가를 가야만 했다.
봄과 여름 가을엔 어쩌다 한번쯤 과수원집 네쩨오빠와 마주 칠 때가
있지만 겨울엔 바람만 마주칠 뿐이였다.
그래서 겨울의 과수원은 아무 이야기도 아무 의미도 없이
지나 오고 지나 갔었다.
이런 시골에서 큰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은 해 본 도둑질이 있을
겁니다. 서리라는 거 .콩서리 수박서리...
나도 한 번 경험이 있었다.
콩도 수박도 아니고 사과를 훔쳐 먹었다.
초등학교 때 동생과 이종사촌 여동생과 소낙비가 내리던 여름 한 낮.
우산 하나를 여럿이서 쓰고서 과수원길을 지나는 척 하다가 아직
여물지도 않은 초록색 사과를 따서 우산에 담았다.
우리들은 비를 쫄딱 맞고 우산을 여럿이서 붙잡고 큰 길까지
나왔다."이히히..들키지 않았구나."
길가운데 고여 있던 빗물에 사과를 씻고 있는데,
과수원집 둘째오빠가 장승처럼 무섭게 내 눈앞에 서 있는게 아닌가!
그 오빠는 사과 한 알을 집어 한입 깨물더니
"아직, 익지도 않았는데..."
그러더니 길가 풀섶으로 다 던져 버렸다.
또 그러더니 과수원길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우린 겁이나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다가 약속이나 한 듯
풀섶으로 달려가 퍼러딩딩한 사과를 와그작와그작 먹었다.
둘째 오빠가 한 잎 깨문 사과까지 다 먹었다.
참말로 시고 달고...아무튼 잊을 수 없는 맛이였다.
네째오빠 생각에 창피했지만 먹는 거 앞에서는 어쩔수 없었다.

세월이 많이 많이 물처럼 구름처럼 흘러갔다.
과수원의 사과나무는 언제였는지 베어 없어지고
그 곳에는 젖소들이 똥을 질퍽하게 쌓아 놓고 있었다.
사과향기가 어릴적 동심처럼 번지던 날은 가고 쇠똥향기만
물커덩거렸다. 이 때가 스물 몇 살 젊은 시절이였다.
과수원집 네째오빠는 결혼을 해서 고향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사과를 키우더니 쇠똥을 치우면서 말이다.
또 십 몇년이 바람처럼 스쳐갔다.
고향은 변해도 너무 변해 버렸다.
투명하던 냇물은 뿌옇게 거품이 떠있고
지붕을 맞대고 모여 살던 집들은 비어 있는 집이 더 많아졌다.
어느날 친척들이 모여 고향 얘기를 하던 중,
과수원집 네째오빠 소식이 메아리처럼 나의 귀를 울리며
지나갔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정신이 왔다갔다 해서
정신병원에 있다는 것이다.
아득해지면서 사라지는 메아리 같은 느낌.
어릴적 추억에만 남아 있는 사과나무.
그렇게 추억으로 저문 과수원집 네째 오빠.
세월이 흐르듯,
너무나 변해버린 고향 얘기들이 지금도 간간히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