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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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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이 삼촌(23)- 드디어 알아버렸다...


BY 솔바람소리 2009-01-19

내 몸은 축복받은(?) 몸이었나 보다.

사돈과 예견치 못했던 두 번의 성관계, 그때마다 어김없이 임신을

하고 말았으니... 그 어이없는 축복에 난 아연실색+망연자실+자포자기했다.

두 번째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떠오른 온갖 상념들 속에 난 질식할 것

같았지만 두 번 다시 낙태를 할 자신은 없었다.

그렇다고 사돈을 받아들이며 살 자신도 없었다. 늘 고민했고 방법을 모색했지만

답을 찾지 못한 상태로 번번이 사돈과의 작별을 직감하고 그래서 헤어질

명분을 찾아냈지만 그럴수록 그는 내게 향한 집착을 보란 듯이 사고 친 분란을

보이곤 했다. 자신이 망가지는 것이 꼭 나 때문이란 것처럼 주변을 놀래키는

일들을 만들곤 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내 충고에도 망나니인 용남과 어울려서 더한 술을 퍼마시고 다니며

쌈박질로 유치장 신세까지 졌던 그에게 어느 때보다 정나미가 떨어졌기에

여러모로 가망 없는 우리 만남을 이유를 들며 이별을 통보했던 날 밤,

어김없이 술에 떡이 된 그가 작정하고 내 방 옆, 담장을 밟고 서서 고요함을

깨며 창문을 사정없이 두드려 댔다. 남들의 이목을 늘 두려워했던 나는

그 모습을 남들에게 들키게 될 것이 겁이 나서 하는 수 없이 창문을 열어주고 말았다.

술에 취한 상태로 창문을 넘어 들어오던 사돈이 잃어버린 이성처럼 중심도 잃고

내 방으로 굴러 떨어지며 ‘쿵’하는 둔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 순간에도 당황한 것은 나뿐이었다. 그래야 한다고 정해놓은 것처럼 언젠가부터

당황은 내것이 되어있었다.

구덩이를 피해 도망친 사냥감이 더 큰 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부모님이 계신 집안으로 늦은 밤, 들어 온 것도 모자라서 겁을 상실한 것처럼

그는 혀가 말린 말소리에 언성까지 높였고 나는 연실 쩔쩔매고 좌불안석하고

있었다. 남들의 이목보다 더 두려운 내 부모님의 나에 대한 믿음, 그것을 져버리고

만 행동이 들통 날 것이 두려웠다... 몹시...

 

그런 것에 아랑곳 하지 않고서

왜 자꾸만 자신에게서 벗어나려고만 하느냐고 투덜거렸다... 그가...

왜 자꾸만 자신을 힘들게 하느냐고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와 헤어질 수 없다고 아이처럼 떼를 쓰며 말했다....

나는 연실 ‘알았어요’ 라며 그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안방 문, 응접실 문, 내 방문까지 모두 꼭꼭 닫아 놓았기에

설마, 부모님이 눈치채지 못할 거라며 나를 위로했지만 그래도 두려웠던

깊은 밤. 정신 차리고 어서 돌아가라며 사돈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내방 문밖에서 방문의 손잡이를 요란하게 흔들어댔다.

곧이어 목소리를 억누른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도 들렸다.

 

“문 열어! 빨리!...”

 

심장에 쏴한 냉기가 감돌더니 내장 아래까지  쓸어내렸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 1초 사이 수 만 가지 생각을 떠올린다는 것처럼 잠깐 동안

별별 생각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벌어지고 만일... 피할 길이

없었다. 난, 자포자기하며 내방 문을 열고 놀라서 얼어붙은 엄마를 바라봐야

했다.

 

세상에서 가장 친하다고 자부했던 모녀였다.

우리에겐 비밀도 없었다. 그렇게 믿고 살았던 나와 엄마였다.

문 앞에 서서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나와 내 방 안을

보고 선 엄마를 보며 잠시 이런 생각을 했다.

 

‘엄마가 언제부터 방문 밖에 있었을까? 무슨 소리를 얼마나

듣었을까? 이제, 엄마는 더 이상 나를 믿지 못하겠지... 의지하지도

못할 거야...’라고...

 

그 순간 부딪힌 엄마와 나의 시선은 결코 접한 적 없던 낯선 눈빛들이었다.

우습게도 그 상황에 우리에게 좌절을 안겨준 장본인인 사돈은 ‘꿩’이 되어

있었다.

 

사냥꾼에게 포착되고만 꿩을 내 눈으로 직접 접한 적은 없었지만 외할머니 옛날

얘기 속에 등장했던 꿩은 오래토록 기억에 남을 정도로 어리석은 짐승

이었다. 궁지에 몰린 그 놈은 온몸을 들어낸 채 고개만 수풀에 처박고서 제가

숨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 어리석은 꿩의 모습처럼, 좀 전까지 이성을 잃고 겁을 상실한 듯 행동했던

사돈이 내 침대와 옷장사이의 작은 틈바구니에 고개만 디밀고 엎드려 있었다.

어린 막내가 있는 우리 집안에서 내 몸을 범했고 내 부모님이 계신 밤에도

서슴없이 쳐들어와서 내 몸을 유린했던 용기백배의 남자가, 불리하다 싶으면

동네방네 다니며 나와의 관계를 소문내겠다고 했고 내 부모님께 우리들의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던 자가 보일 시츄레이션으로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어느 때보다 실망하고 말았다. 내게 사랑을 운운했던 자라면

비겁하게 숨지는 말았어야 했다. 차라리 떳떳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어야 했다.

그리고 허락을 구해야 옳은 것이라고 생각 했다. 그래야 내가 조금은 덜 비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정작 모습을 감추고 싶은 처절함을 이기고 꿋꿋이 서있는 나를 지나쳐서

꿩이 된 사돈의 멱살을 잡고 끌며 현관으로 향했다.

 

“어머님...”

 

그 순간 사돈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이었다.

 

“입 닥쳐! 내가 왜 니 어머님이야. 얘 아빠 일어나면 너는 죽은 몸이야.

너 죽는 건 괜찮지만 내 남편 죄인 만들게 될까봐 무서우니까 당장

나가, 이...!“

 

소리는 죽였지만 독을 품은 엄마의 말은 차마 끝도 맺지 못했다.

강한 남자의 힘으로 내 몸부림도 쉽게 제압하며 몸을 범했던 사돈이

엄마에게는 힘없이 질질 끌려 나갔다. 그 모습이 꼭 복날의 바둑이 같았다.

늘 그에게 존대하며 대했던 엄마가 대문 밖으로 사돈을 헌신짝처럼 패대기치더니

곧 내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아 잠갔다. 그리곤 푸세식 변기에 앉은 모습으로

쭈그리고 앉았다.

 

“언제부터니...”

 

한겨울 혹한에 빙하가 떠다니는 바닷물에 손을 담고 살았어도 떨지 않던

엄마가 오한 든 사람처럼 부들거리는 몸과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불효막심을

넘어선 나는 점점 자포자기한 심정에서 오히려 마음이 ‘편안모드’로 접어들고

있었다..

 

“좀 됐어.”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을 차분한 내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다.

크지 않은 엄마의 눈이 동그라미를 그렸다.

 

“안 돼. 절대로... 저런 놈이랑...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공항 상태에 빠진 듯 정리돼지 않은 말들이 엄마 입을 통해서 나왔다.

 

“어머님, 허락해 주세요...네?...”

 

닫힌 창밖에서 사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를 문 엄마가 창문으로 다가가서

당장 꺼지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해버린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사돈은 계속해서

‘어머님’을 운운하고 있었다. 엄마는 내가 창가로 가는 것조차 막고 섰다.

편안했던 마음이 줏대 없이 다시 지옥이 따로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런 상황 속에 놓인 우리들을 어째야 할까 막막했다.

 

내가 처한 상황을 엄마가 알게 될까봐 두려웠던 일이 드디어 벌어지고 말았고

그래서 죄스런 마음으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도 같았다. 하지만 잘못인줄

알면서도 사돈과의 만남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그 지경까지 끌고 왔던 내가

잘못했다며 눈물을 흘리는 신파를 그려 엄마에게 용서를 빌게 된다면 비참할 것

같아 차라리 숨으려는 자존심을 끌어내어 뻔뻔함을 가장했다.

그리고 늦은 밤 동네가 시끄러워지기 전에 얼른 밖에서 고집 부리고 있는

사돈을 돌려보내는 것이 우선일 것 같았다.

 

엄마의 저지에도 맞서며 창가로 향한 나는 맨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엄마의 염장을 사정없이 지르고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체 뒤늦은 선처를

바라며 청승을 떨고 있는 사돈을 향해서 말했다.

 

“엄마랑 내가 조용히 얘기할 수 있게 해줘요!“

 

상황역전이었다. 그와 나의 위치가...

그동안 내 식구들과 마을사람들이 우리들의 사이를 알게 될까봐 전전긍긍했지만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게 된 상황, 결정권은 내게만 있었다.

내 말에 고분고분 자리에서 일어서는 사돈은 술이 어느 정도 깬 것도 같았다.

내 방에서 흘러간 불빛에 비췬 사돈의 모습이 한없이 초췌해 보였다. 그리고 더없이

초라해 보였다. 누더기를 걸친 걸인마냥..

 

“이모, 나 버리면 안돼요!”

 

민박이 있는 곳과 상관없는 어둠속으로 사라져가기 전 사돈이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다시 조용해진 밤은 적막함 그 자체였다. 개미가 걸어가도 발자국 소리가

들릴 것도 같은 짙은 고요함이 나와 엄마를 어느 무인도에 떨쳐 놓은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켜기도 했다.

엄마는 잠시 스쳐지나가는 사람처럼 여전히 엉덩이를 바닥에서 뗀 채로 쭈그려 앉은

자세를 고수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엄마를 침대에 걸터앉아서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헤어지지 않는다면 다리몽둥이를 분질러서라도 방안에 가둬 둘 거야.”

 

드라마 속에서 결사코 반대하는 연인들의 부모가 했던 대사가 엄마의 입 밖으로

나왔다. 내가 임신한 사실을 모르고서...

미혼인 딸의 방에서 늦은 밤 남자가 들어있었고 그 남자라는 인물이 조카사위에게

진즉에 전해 듣기로, 갖은 것이라고는 그것 두 쪽이 전부요, 그 주제에 입도 까탈스럽고

술은 징그럽게 먹는다며 한마디로 ‘징한 놈’이라고 했고 그래서 그리 알던 선영이

삼촌이었다.

 

그저 조카 사둔쯤으로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인물이 애주중지 키웠던 딸과

한방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이었을 텐데, 더한 사실이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된다면 엄마는 어떻게 될지, 앞선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엄마의 말에 나는 어떤 말로 대꾸를 해야 할지 몰랐다. 정확히 말하면 면목이

없었다. 그런데도 내 몸은 엄마의 말에 돌잡이 아기가 도리도리하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믿었던 딸에게 배신을 당한 엄마는 충격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하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눈동자가 흔들렸고 동공조차 간간히 확장과 수축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도 나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엄마는 그조차 믿기지 않는 다는 듯 낯선 딸의 모습에 당황마저 하고 있었다.

 

“헤어질 수 없다고? 왜... 너 왜 그래...**야, 왜 못 헤어져? 협박당하니?...

그런 거야?“

 

정곡을 찌른 그 말에도 내 머리는 여전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왜 엄마의 말에 수긍하지 못하고 그런 행동을 하는지 나조차도

모를 일이었다. 정말... 모를 일이었다.

단지 협박이 두려워 내세울 것 없는 남자에게 질질 끌려 다녔다고 시인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질건 아무 것도 없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너... 그 정도 밖에 안 돼는 애였어?... 내 딸이... 그 정도 밖에?”

 

인정 할 수 없다는 듯 내게 크게 실망한 엄마는 여전히 말끝을 간간히

잘라먹고 쭈그린 자세로 부들거렸다. ‘그 정도 밖에?’ 라는 엄마의

질문에 난 얼어붙은 입처럼 몸도 굳어버린 듯 꼼짝 할 수 없었다.

 

“안 돼! 네가 무슨 생각으로 있던... 저런 때려 죽여도 시원찮을 놈이랑은

결코 안 돼!!!“

 

아버지가 알게 될까봐 두려워 낮춘 목소리였지만 엄마의 강하게 절규하는

심정이 내게 그대로 전해졌다. 그런데 내 목은 또 도리도리를 하고있었다.

내 몸이 고장 난 장난감처럼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입 닫은 딸이 사춘기 때도 보이지 않았던 반항으로 얼굴에 철판을 깔고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 그대로 있는 것을 망연자실 바라보던 엄마.

 

“왜 못 헤어져? 저 놈이 엄마보다 더 중요해?!... 그런 거야?”

 

가시밭길을 걷듯, 엄마는 말하는 것이 고통스러워 보였다.

어쩜 들어나는 사실들이 확인 될수록 믿었던 딸에 대한 배신감이 비수가

되어 엄마의 온 몸을 난도질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엄마도 간간히 믿을 수 없고 믿고 싶지 않은 현실 앞에 나처럼 고개를 좌우로

흔들기도 했다.

엄마보다 더 중요하냐는 질문에 난 다시 동상처럼 꼼짝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놈은 안 된다... 안 돼...알았어? 안된다고!”

 

“안될 것 없어. 돼”

 

내 머리였고 내 몸이었고 내 입이었다.

그런데도 내 머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짙은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듯 헤맸고 마음과 달리 몸이 움직였으며 생각과 다른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모를 일이었다. 나도 나를...

엄마가 우리들의 일을 알게 되면 충격으로 쓰러지게

될까봐 걱정했었다. 하지만 곧 쓰러질 듯 힘겨워 보이긴 했지만

버티고 있었고 그 상태를 유지해주길 간절히 바라면서도 서슴없이

나는 배신이란 총알로 엄마에게 난사 질을 해댔다. 닫았던 입으로 뱉어 낸

딸의 말에 엄마가 잠깐 얼음이 되었다.

모녀가 얼음, 땡 놀이를 하듯 번갈아가며 그러고 있었다.

 

“뭐가 된다는 거야... 그 놈이랑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너 미쳤구나...”

 

자포자기였다. 엄마의 어투가.

내 속에 이솝우화 속에 주인공 청개구리 한 마리가 있는 것처럼 엄마가 강한 반대를

할수록 사돈에게 강한 연민의 싹을 피우고 있었다.

헐벗은 가지에 새싹이 돋더니 파릇파릇 무성해지듯... 그렇게...

엄마가 부정을 할수록 내 눈 앞에서 떨고 있는 엄마보다 어둠 속에

사라져간 사돈이 더욱 가엽게 여겨졌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엄마 말대로 내가 미친 것이 아닐까, 하고...

그런 나를 또 이해할 수 없었다.

 

“너... 혹시.........”

 

두려운 듯 말을 잇지 못하는 엄마였다. 배 째라는 듯 당당하기만한 딸의 입에서

나올 말이 겁이 나는지 차마 입에 실지 못하는 엄마였다.

그 순간 나는 차라리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엄마의 심정 따위 상관없이 빨리

끝장을 보고만 싶었다. 그래서 엄마가 차마 뱉어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말을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 임신 했어.”

 

천하에 못된 년이 되어 버린 딸의 말에 엄마가 다리가 풀린 듯 철퍼덕 주저

앉고 말았다. 그러더니 바닥에 고꾸라지듯 엎드려서 몸을 들썩였다. 그렇게 소리죽여

한동안 울고 있었다. 모진 세월 나로 인해 피눈물을 흘리고 살아왔던 가엽은 엄마를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은혜를 원수로 갚듯 그렇게 울리고 말았다.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 넘쳤다. 참으려고 애를 써도 참을 수가 없었다.

홍수가 난 듯 철철... 콸콸... 차고 넘쳤다. 하지만 곧 고개를 들 엄마에게

그 모습을 보일 수가 없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연실 훔쳐내며 시치미를 떼려고

애를 썼다.

엄마는 내게 여자의 순결을 가르칠 때 몸을 줘버린 남자가 누구든

그 사람과 살아야 한다고 했다. 분명...

그래서 순결을 줘 버린 것을 벗어나 임신까지 하고 말았다면

끝나버린 게임처럼 더할 말이 없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퉁퉁 부은 눈으로 다시 몸을 세운 엄마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단호했다.

 

“엄마가 모두 정리해 줄 거야. 애만 떼자. 그러고 나서... 네가 하고 싶은 것

모든 다 하고 살아라. 네가 하고 싶다는 것 엄마가 다 하게 해줄 테니까,

애만 떼자.“

 

의외였다. 엄마의 말이...

 

“난 이제 이 애를 뗄 수 없어. 벌써 두 번째 애인데?”

 

지뢰밭에 지뢰 터지듯 내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들이 폭탄이었을 것이다.

엄마에겐.

확인 사살을 해대듯 충격적인 말들을 뱉어내는 딸에게 엄마는 그 순간

무엇을 느끼고 있었을까... 잠시 그런 생각을 떠올리기도 했다. 낙태를 했을 때보다

더한 죄책감이 들었지만 탤런트가 연기하듯 난 태연을 가장하고 앉아있었다.

엄마나 나나 그 순간 더 이상 물러 설 곳 없는 생쥐같은 심정이지

안았을까...

 

‘엄마, 미안해...정말 미안해. 시간을 돌릴 수만 있었으면 좋겠어.

보일러가 고장 나서 집안이 냉동고가 되더라도 사돈이 오는

일을 만들지 말았어야 했어. 그게 아니면 민혁에게 받은 인형 따위 밖으로

굴러다니든 말든 신경 쓰지 말았어야 했어. 아냐, 내가 뭔가 해보겠다고

설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야. 모두 내 잘못이야.

엄마,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줘... 이 일을 어쩌면 좋지? 나도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고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

무서워. 내가 엄마 말대로 애를 떼고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벌어졌던

일이 없던 게 되는 것은 아니잖아. 난 버린 몸인데? 그런 나를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볼 자신이 있어? 세상에 비밀은 없는 거잖아. 경미언니를(사촌언니)

봐서 엄마도 잘 알잖아. 그 비밀을 감추기 위해서 나와 엄마는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해야 할까? 그러면서 받는 고통은 또 얼마일까? 엄마가 내게 받은

배신감과 충격을 벗어날 수 있을까?

난 그동안 그랬던 것처럼 태연하고 해맑게 엄마를 대할 수 있을까?

아니잖아... 돌이킬 수 없는 일이잖아. 난 그게 두려운 거야 엄마...

벌써 물은 엎질러져 버렸는걸... 이젠 주워 담을 수도 없는걸...‘

 

따뜻한 엄마 품으로 달려들어 통곡하며 뱉어내고 싶은 말들이었다.

터지려는 울음보를 참으려니 목울대로 찌르르 고통이 몰려들었다.

울음을 참았고 말들을 참으며 여전히 뻔뻔할정도로 꼿꼿한 자세로

침대에 걸터앉아있었다.

 

선택의 기로에 놓은 순간 앞에서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주사위는 던져지고 말았다.

모두에게 불리한 쪽으로 흘러가는 게임이 시작됐지만 내가 감수해야 할

일들이었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내가 뿌린 씨앗들이었다. 내가 거둬야 했다.

남들에게 변명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세상 일찍 나와 떠돌며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남자와 혼인 신고를

하고 살 수 없더라도 물러나지 않을 각오가 문득 떠올랐다.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것처럼 술술 정리가 되고 있었다. 그래야 옳다고 생각 했고

그 길만이 모두에게 떳떳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사돈과 가정을 이루고 살다보면 자연적으로 가족애를 깨우쳐 줄 수도

있겠지, 벌어오는 돈으로 알뜰하게 살다보면 삶의 여유도 만들 수

있을 것이고 혼인신고도 특별한 날을 계기로 죄수들이 사면받 듯

언젠가 혼인을 인정받을 수도 있을 거야. 나만 조금 감수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하는 용기가 생겨났다.

바보 온달에게 희생하며 살던 평강공주 덕에 훌륭한 장수를 만들 수

있었다는 전설처럼 쉽진 않겠지만 고진감래를 꿈꾸며 희생을 각오

할 자신감을 형성했고 그래도 두려움이 밀려들면 그 길만이 훗날을

모두에게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길이라며 위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