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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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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이 삼촌(19)-착한 남자(2)


BY 솔바람소리 2008-12-29

낙태를 하려고 산부인과를 들른 첫 날 간호사는

수치스러워 고개도 제대로 못 들던 미혼인 내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런 일이 비일비재 하다는 듯, 다음에 올 때의 주의사항으로

금식을 당부했었다. 그 이유로 평소에도 밥상머리에서 밥알을 세느냐는 엄마의

걱정을 듣던 내가 아침 일찍 식사도 거른체 밖을 나섰다.

 

그동안 비밀 없이 세상을 의논하던 엄마에게는 친구와의 약속이

있다는 거짓말을 유창하게 늘어놓고서 민혁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출발했다.

먹구름 가득한 장마철 우중충한 잿빛 하늘같은 내 마음과 상관없이 봄이 가까운

밖은 따스하고 화창하기까지 했다.

 

“애만 뗘 봐요! 결코 용서하지 않아요.”

 

아이를 절대 낳을 수 없다는 내가 불안한지 사돈이 습관처럼

협박을 했었다. 그가 말하던 용서치 않음이 어떤 건지,

이판사판 공사판 막가는 심정의 나는 차라리 그 순간 그의

행동이 기대마져 됐던 것 같다. 읍내로 나서는 순간에 사돈의 사투리 강한

억양의 목소리가 귓가를 떠다녔다. 나는 그것들을 무시했다.

 

여튼... 나는 사돈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엮일 수가 없었다.

화근의 씨앗덩이, 뱃속에서 아직 형체조차 온전히 갖추지 못한 생명체인

아기를 그래서 지워야만 했다.

 

나는 미혼이었다. 제대로 된 연애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사랑도 몰랐다. 그런 내게 뱃속의 아기는 회충, 편충, 십이지장충, 갈고리회충만치나

끔찍스런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이기에... 타고난 모성본능이 낙태, 그 자체만을 고집하는

내 자신에게 죄의식을 갖게 했다.

 

약속 시간보다 좀 이른 시간에 터미널에 도착했다.

저만치 서서 바닥을 바라본 체 상념에 젖어있는 민혁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쳐진 어깨가 세상을 인 것처럼 묵직하게 내려앉아있었다.

 

“형, 많이 기다렸어?”

 

민혁은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록 나를 눈치 채지 못했다. 내 말에 눈을 맞춘 그의

눈이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그 속에 슬픔과 좌절의 고통이 녹아보였다.

 

“아니... 어디로 가면 될까?... 가자. 밥도 못 먹어서 힘들겠구나...”

 

식사를 거르고 병원을 가는 것을 어찌 알았을까?... 나는 그의 말에 잠깐 의아했다.

하지만, 그였기에, 민혁이었기에, 나에 관해서는 뭐든 대충이 아닌

완벽에 가깝게 자료를 채집하여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던 그였기 때문에,

그런 일쯤 대수로울 것도 없다고 의아함을 접고 말았다.

 

그날은 평소와 달리 나만 알고 있는, 내가 가야할 목적지를 향해서

내가 앞장서서 걸었다. 그리고 버스에 올라서 차 창밖을 향했다.

온도차로 습기를 가득 머금은 유리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달리는 버스 밖으로 형체만 짐작되는 산과 들판들이 뿌옇게 자리한 습기에

가려 무작위로 지나쳐갔다.

평소와 다르긴 민혁도 마찬가지였다. 과묵한 나를 대신해서 조잘대던 그가

말이 없었다. 남자가 체신 머리 없이 왜 그러냐며 구박을 받아도 굽힘없이

떠들어 대던 그도 과묵을 지니고도 있었나보다.

침묵을 뒤집어 쓴 민혁이 주머니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내가 보고 있던

차창 유리의 물기를 닦아주었다. 그의 어떤 행동에도 난 창밖만 바라보았다.

 

차마 그를 볼 수가 없었다. 아무리 강한 척, 뻔뻔한 척 노력하려 해도

자꾸만 얼굴이 달아오를 것 같은 수치스러움을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얼굴에 난 솜털마저 달아오르는 열기로 녹아 없어질 것만 같은 후끈거림으로

그를 바라 볼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자꾸만 무겁게 짓누르는 죄의식이

뇌리를 가득 채우더니 점점 가슴으로 내려앉아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어서,

그것마저 비참해서 적반하장처럼 떼를 쓰며 울 것도 같아서, 그를 볼 수가

없었다...

그런 나의 손을 민혁이 잡아들더니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갔다.

언제나 따뜻했던 그의 손이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아니 그 순간  

모든 것에서 체념하려고만 애쓰던, 내 몸에 달려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차디찬 내 손을 그가 잡았을 때 평소처럼 화를 내며 빼내지도 않았다.

새침을 떨지도 않았다.

 

“**야, 힘들지? 괜찮아... 금방 끝난다더라.

너무 걱정하지 마...“

“......”

 

하루 온종일 물에 잠겨있던 신문지처럼 촉촉하다 못해 질퍽하게

내려앉은 그의 목소리에 나는 더한 죄책감이 들었고 어떤 말로도

대꾸할 수 없었다. 그저 내 눈은 민혁의 수고에도 금세 물기가 맺혀버린

창밖만을 향하고 있었다. ‘금방 끝난다더라...’ 그걸 누구에게 물어봤을까? 궁

금하기도 했지만 입을 닫고 있었다.

 

“내가 널 사랑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널 사랑했나봐... 네게 향한 내 마음, 변함이 없을 거야...아직도 난 널

사랑한다.“

“......”

 

강한 의지를 나타내듯 내 손을 잡고 있던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언젠가 긴장했을 때처럼 그의 손이 금세 땀으로 젖어 내 손까지 축축하게

적셨다. 나는 짜증내며 그 손을 빼내지도 않았다.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부터 끝까지 이용만 하고만 민혁과의 이별을

어떻게 해야 덜 미안할까, 나는 그 걱정까지 하고 있었다.

그동안 이기적인 나였지만 그에게 상처를 덜어주며 헤어지고 싶었다.

민혁의 어떤 말에도 그와의 예고된 이별을 돌이킬 수 없었다.

 

사돈을 피해서 민혁과 결혼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당시에 몸만은 순결한

상태였다. 후에 버려진 몸이 된 상태에서도 그에게 미안은 했지만,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가 이성으로 느껴지진 않았지만, 어차피 누군가와 꼭 결혼을 해야

한다면 내게 죽고 못 사는 민혁과 미안해서라도 함께 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은 그마저도 내게 허락지 않았다.

잔인한 신의 뜻에 따라 나또한 잔인한 인간이 되어 민혁에게 절망을

안겨준 상태에서 그의 여자가 될 수가 없었다.

 

그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고 해도, 나를 용서한다고 해도, 어떤 일도 개의치

않는다고 해도... 그의 마음과 상관없이 내가 그를 당당히 바라 볼 자신이

없었다. 그에게 사랑을 느꼈다면 어쩌면 모험을 강행하려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난 그에게 먼지만큼의 사랑도 느낄 수가 없었다.

 

벙어리처럼 입을 닫고 있던 나는 병원에 도착해서 간호조무사가

건네주는 가운을 입고 아랫도리를 홀랑 벗은 채로 수술대에

올라가서 미혼의 신분으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두 다리를 세워 벌리고

누워서 남자 의사를 맞았다.

익숙한 수술용 환한 라이트가 눈부시게 나를 비추고 있었다.

 

젠장... 또 너를 보는구나...

다신 저놈의 불빛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이런 추한 꼴로 또 보내...

 

비참한 그 순간, 그렇게 나는 나를 비아냥거리며 마취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은 것 같은 잠시 후 누군가 나를 강하게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몽롱한 상태에서 조무사의 손에 이끌려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무슨 정신에 회복실로 가서 누웠는지 모르겠다. 어느새 나는 아랫도리도

입고 있었고 링거까지 꽂고 있었다. 회복실은 침대 방이 아닌 따뜻한

온돌방으로 되어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곳에는 나 말고도 양쪽으로

두어 명의 여자들이 더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모두가 등을 돌린 체였다.

나만큼이나 그녀들도 처참해 보였다. 결혼한 여자들일 수도 있었겠지만...

내 눈에 보인 그녀들이 그리 보였다.

 

나는 아직 한참 남은 링거의 바늘을 혼자서 빼내고 밖으로 나왔다.

간호사가 말렸지만 됐다고, 괜찮다고... 결코 되지 않았고 괜찮지도 않은 마음으로

허리를 반을 접은 자세로 출구 쪽 의자에 앉아있는 민혁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과 가까이 있던 업무창고에서 내 뱃속에 생명을 처참하게 찢어

죽여준 값을 치뤘다. 그런 나를 뒤늦게 의식한 민혁이 다가와서 어지러워

비틀거리는 내 곁에 서서 팔을 잡아주며 “괜찮아?” 하고 물었다.

그리고 “응”하는 나를 데리고 병원 문밖을 나섰다. 그곳을 나서며 보았던

거울에 비췬 내 모습이 가관이었다. 늘 단정했던 머리모양이 헝클어져

미친년만 같았지만... 세상이 어지럽게 비틀거리는 그 순간 술에 취한 듯

마음마저 풀어진 상태에서 그것이 뭐 대수야?, 하며 무시해버렸다.

 

2층에 있던 개인 산부인과 건물 아래층 지하에 민혁이 평소 수고하며

찾아 헤매던 레스토랑이 구색 맞춰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미리 약속한 것처럼 그곳으로 내려가서 구석진 곳으로 자리 잡고

앉았다. 병원에서 체 30분도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오전 시간이 아직 지나지

않은 시간에 민혁이 웨이터에게 정식 1인분과 병맥주 2병을 시켰다.

민혁이 앞으로 밥을 대신해서 술을 먹고 살려나보다고 생각했지만 그마저도

개의치 않았다.

 

헝클어진 모습으로 앉아있는 나를 바라보던 민혁이 긴 팔을

과시하듯 맞은편에서 팔을 뻗어 내 머리를 어루만져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줬다. 그 손도 뿌리치지 않았다.

 

조용한 음악이 흐리던 실내에서 침울하게 앉아있던 우리 앞으로

식사로 주문한 정식보다 병맥주와 그라스 두 잔이 먼저 나왔다.

 

흐릿한 조명이 눈에 익숙해지자 민혁의 얼굴이 내 눈으로 자세히 들어왔다.

좀은 작은 눈, 보통보다 조금 높고 도톰한 코, 뚜렷하지만 조금은 큰 듯한

입매, 곱슬거리는 짧은 머리... 나는 마지막을 고하며 민혁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런 내가 멋쩍은 듯 시선을 피하고 민혁이 혼자 따르려는

맥주병을 내가 뺏어서 그의 잔을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내 잔에도 맥주를

가득 따랐다. 민혁이 놀라며 내 잔을 뺏으려고 했지만 나는 뺏기지 않았다.

그리고...건배없이 원샷으로 마셨다.

그리고 또 한잔을 따라서 맥주를 물마시듯 단숨에 마셨다. 빈속에 넘어가는

맥주 액이 따끔거리며 식도를 타고 넘어가서 위에 도달하는 것을 느꼈다.

맥주는 술이 아니라고 친구들과 마실 때 호기를 부리던 나였건만 금세

취할 것만 같았다.

 

“낙태는... 애를 낳는 거랑 같다더라... 술을 마시면 안되는 거야.

내가 술을 마신다고 화가 나서 그런 거면 안 마실게. 너도 그만 마셔.“

 

민혁이 한모금도 마시지 않은 맥주잔을 한쪽으로 치우며 내게 말했다.

취할 것 같았지만 취하지 못한 내가 그 잔까지 집어 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형!”

“응...”

“고마워.”

“고맙다는 인사는 거리감 있는 사람들끼리 하는 말이야.”

 

언제나 친근하고 자상했던 목소리였다. 내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한 듯

그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있었다.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 잘 들어.”

“응...”

 

최대한 상처를 덜 주고 싶었지만... 생각만은 아름다운 이별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그 상황에 가당치도 않은 개풀 뜯어먹는 계획임을 머지않아

느꼈고 차라리 끝까지 못된 년이 되고 마는 편이 낫지 싶었다.

늘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던 민혁이었고 늘 싸가지가 없던 나였으니까

끝까지...우리 모습 고수하고 말자, 싶었다.

 

“난 앞으로 형을 보고 싶지 않아. 오늘로 우리들의 만남은 끝이야.”

“......”

“형은 매일 나한테 사랑한다고 했지? 정말 사랑한다면 내가 제정신으로

살수 있게 해줘.“

“......”

“형을 보면 오늘 일이 기억 날 테고... 그럼 난 또 힘들겠지. 난 정말 오늘 일

기억에서 모조리 지우고 싶어. 형에게 정말 고맙게 생각해. 그리고 미안하게

생각해. 제발 부탁이야. 나한테 연락하지 말아줘.“

“......”

“형을 좋아해. 정말 좋아해. 하지만... 사랑하지는 않아. 형이 뭐라고 말해도

난 형에게 갈 수 없을 것 같아. 오늘 이 음식 값은 내가 치루고 갈 거야.“

“......”

 

정식이 나오기도 전에 내 말만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을 닫고 고개를 처박고

있는 민혁을 그대로 두고 테이블을 벗어나려는 내 손을 민혁이 붙잡았다.

하지만 난 그의 손을 뿌리치고 어지러운 상태에서 몸을 힘겹게 지탱하며 계산을

치루고 밖의 거리로 나섰다.

 

이제는 세상을 새로 살고 싶었다. 그동안 내가 알고있던 세상과 담쌓고

새로운 나를 맞으려고 했다. 그렇게 당돌하게 예전에 나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