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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하나 다쳤을 뿐인데


BY 모퉁이 2009-02-17

뭐 큰일이 난 것은 아니다.

그저 손가락 하나 다쳤을 뿐이었다.

뭐  잘해 먹는 것도 아니면서 정월 대보름이라 나물이나 몇 가지

볶아보려다 그만 헛손질에 왼쪽 중지에 칼자국을 남겼다.

섬뜩한 느낌으로 보아 슬쩍 스친 단순한 실수는 아닌듯 했고

나름 신속한 동작으로 지혈은 쉽게 되었으나

벌어진 마디는 아무래도 의사 도움을 받아야 되겠기에

일요일 오후 당직 병원을 찾아 여섯 바늘을 꿰매는 공사(?)를 했다.

다행히 인대와 신경은 다치지 않았다 했고

가운데 손가락은 부목을 대고 칭칭 동여맨 붕대가

흡사 대형사고를 겪은 티를 내게 했고 그 날로 주방 출입에 지장이 생겼다.

하다 만 묵나물은 서툰 솜씨나마 딸내미가 정리를 했지만 다음이 문제였다.

 

일주일에서 열흘 후에 실밥을 풀기 전까지는 물을 묻혀서도 안되며

무리하게 움직이다가 실밥이 터지면 고생하니 조심하라는

 단순하지만 중요한 당부를 받고 보니

주부가 손을 움직이지 않고 집에 있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입원을 해서 간호사의 시중을 듣는 것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내가 해야 되는 일인데

고행이 따로 없다. 이것이 고행이여.

 

부목을 댔으니 장갑도 들어가지 않고

이제부터 완전히 한손잡이가 되어 버렸다.

한 손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있지만

주방에서 하는 일은 대개가 두 손을 써야 되는 물 일이다.

설겆이도 양 손을 써야 되고 행주도 양 손으로 씻어 짜야 되고

쌀은 한 손으로 겨우 씻을 수 있었지만

서툴러서 시간이 배로 걸리고 그나마 한 손도 힘이 들어가게 되자 쉽지가 않았다.

 

아침이면 밥대신 우유에 선식을 타 먹는 딸아이.

마를 갈아 먹는 남편.

밥을 먹는 나.

몇 되지도 않는 식구가 저마다 다른 식생활을 하다보니

일 같잖은 아침 준비 나름 바쁘고 설겆이가 제법이다.

선식이야 우유에 타서 흔들어 마시면 되지만

마는 씻어 깍아야 되고 사과도 씻어 썰어야 되고

칼질로 생긴 사고라  서투른 행동에 2차 사고가 날까 걱정이 되건만

태연하게 앉아 신문을 보는 남편이나 깨우도록 자는 딸들이나

요 며칠은  남편도 딸들도 이럴 땐 모두 원수 같다.

 

마지 못해 하는 듯한 딸내미의 설겆이도 마음에 안 들고

딱 먹은 것만 씻어놓고 뒷정리가 치밀치 못한 것에 부아가 나고

'내가 할게' 소리 한번 먼저 하지 않는  가족이 모두 미웠다.

한 손으로 머리를 감고, 고양이 세수를 하고, 김치찌개로 몇 끼를 해결했다.

 

이럴 때, 나도 손에 물 묻히지 말고 시켜보자고 먹었던 마음이

사흘도 안되어 내 풀에 내가 지쳐버리게 되던 날이었다.

가르쳐서 알 것이 있고 그저 보기만 해도 알 것이라고 생각한 나와

이것 해달라, 저것 도와달라 말 하지 않으면 모르는 이 속수무책의

다른  성(姓)을 쓰는 식구들이 참으로 야속하고 얄미웠던 날들이었다.

손가락 하나 다쳤는데 뭐가 그리 대수랴 싶은 듯하다.

그래 큰 일은 아니지.

조심스레 하면 시간은 걸리겠지만 다 할 수 있는 일이긴 하지.

그래도 괜히 서운하다.

-딸내미 들으면 저가 더 서운타고 하겠다.

그동안 한 일은 뭐냐고 대들겠다.허허..그래도 서운한 적 많았다 뭐.-

 

어제 실밥을 뽑고 부목대신 일회용 반창고를 바르게 되자

그나마 움직임이 편해졌다.

이젠 장갑이라도 낄 수 있게 되어 정상은 아니지만

설겆이도 할 수 있고, 자판 치기도 한결 낫다.

생각지도 않았던 작은 실수로 며칠 불편을 겪어보니

지난 여름에 발목을 삐어 고생하던 이웃친구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걸음을 걷지 못하게 되자 차라리 팔 다친 것이 낫겠다고 했다.

거꾸로 팔 다친 사람은 발 다친 사람이 부러웠을까.

내 아픔은 남의 아픔에 견줄 수가 없는 것이다.

내 아픈 곳이 가장 아픈 것이다.

손가락 하나 다쳤을 뿐인데도 이렇게 불편함이 따르고

가족들에게 서운함까지 생길 정도이니

인간의 이기심이 어디까지일지...

하지만 정말 아파보지 않으면 아픈 사람 심정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그 아프던 때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나 또한 아프지 않으면 상대방의 아픔에 무뎌지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짜투리 신문에서  무슨 내용을 옮겨 적으려는지

한 손엔 볼펜을 잡고 한 손은 구겨진 신문을 펴고 있는 남편.

접혀 구겨진 신문을 펴서 잡아주었더니 편안하게 옮겨 적는다.

"그것봐. 이렇게 불편할 때 누군가 거들어 주니 편하고 고맙지?"

 

나의 이 깊은 한 마디를 그대는 아시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