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때 처음으로 먼길을 떠날 기회는 수학여행이었다.
수학여행을 갈 수 있는 사람 조사를 했지만 첫날부터 손 든 아이는 몇 없었다.
어떤 반은 선생님이 가정방문하여 부모님을 설득시키기도 했지만 우리반은 반장과 몇이 합심하여 부모님 회유작전에 들어갔다.
대부분 양부모가 일을 하러 나갔기에 빈집이 많았고 엄마가 있었어도 반대에 부딪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반장과 한무리가 우리집에도 들이닥쳤다. 조잘대는 열세살짜리들의 등살에 못이겨 허락을 한 엄마는 내게 눈치를 주신다.
열살 아래 막둥이를 엄마 등에서 떼어 내어 내 등에 매달고 나도 반장을 따라 해가 질 때까지 수학여행 보내주이소~ 노래를 부르러 따라다녔다.
결국 수학여행은 전교생이 다 갈 수는 없었고 우리반에도 몇은 집에서 쉬어야 했다. 연두색 원피스를 입었고,새운동화를 얻어 신었고, 난생처음 객지밥을 먹었다.
하지만 멀미가 너무 심해서 혼자 여관방에 남아 아이들 올 때 까지 기다리던 시간은 내 평생 가장 지루했던 시간이기도 했다.
경주 불국사 돌계단에 앉아 찍은 단체사진이 수학여행의 유일한 사진이었고 옥색 돌이 박힌 브로치는 내가 산 최초의 엄마선물이었다.
그때 입었던 연두색 원피스도 빨간 운동화도 지금은 입을 수도 신을 수도 없을만큼 자라고 말았지만 어느 하루 턱괴고 눈감고 있노라면 키작은 소녀의 나폴거리는 치마자락이 나비처럼 펄럭이며 눈앞에 아롱거리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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