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에 대한 확신
똑똑.
현관의 벨이 있는데도 가벼운 손의 마찰만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사람은 바로 앞집 언니이다.
오랫동안 얼굴 맞대고 스스럼없이 지내다 보니
서로의 호칭이 자연스럽게 언니 동생이 되었다.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사촌이 낫다'는 말을 실감하면서 산다.
하지만 한 가지,
본의 아니게 서로의 비밀한 속사정까지 알게 되는 부담감도 있다.
새로운 소식이 있는 날이면
아침부터 언니의 노크소리를 듣게 되는데 오늘도 역시 무슨 일이 있나 보았다.
보통은 얼굴부터 먼저 빼꼼히 디밀고 들어오는데
어째 몸부터 먼저 들이미는 걸 보니 예사롭지 않다.
화사한 연녹색의 상큼한 원피스 차림이다.
그야말로 봄을 통째로 몰고 온 듯하다.
"우와~~ 언니 너무 멋지다. 아니 너무 상큼하고 사랑스러워.
정말이지 너무 너무 예쁘네....".
내 부러운 눈초리를 기다렸다는 듯 길게 자랑이 늘어진다.
"음, 이거 울 신랑이 어제 잠시 나오라고 하더니
백화점 가서 사주더라. 내가 필요 없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얼마 있다 갈 곳이 있다면서 사 주는 거 있지? 자기 나 어때..
이뻐? 좀 괜찮아 보이긴 해? 자기한테 평가받으려고 왔지이~..".
은근히 말꼬리를 올리는 폼이
더없이 마음이 흡족할 때 나오는 특유의 과장이다.
그러면서 이리저리 몸피를 돌려가며 거울을 보다가 나를 보다가 한다.
원래 날씬한 언니니 뭔들 입으면 안 이쁘랴..
커피 한잔 타줄까 물으니 옷에 묻을까 오늘은 안 마시겠단다.
은근히 뽐내고 돌아가는 언니의 꽁무니를 한참 바라보고 있자니
괜시리 내겐 서러운 봄이라는 생각이 든다.
괜히 부아가 치밀고 남편이 미워진다.
앞집 언니네 남편처럼 돈 좀 잘 벌어오면 좀 좋을까 툴툴대다
옆에서 얌전하게 TV보고 있던 아이더러 책 안보냐고 빽 소리를 내질렀다.
그래놓고는 괜히 미안하다.
무안함에 일어서 부엌으로 가 아침상 물리고
여적 그대로인 밥상을 치우다 설거지통에 눈물 몇 방울을 섞어 내렸다.
내 자신을 위한 옷 한 벌 사 입어 본지가 언제인지 생각나지 않았기에.
울적한 마음에 친정 엄마에게 전화를 넣었다.
이런저런 얘길 하다 옷 얘기를 끄집어내면서
내 인생은 왜 이런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하니 울 엄마가 그러신다.
"아, 이것아. 그 무신 쓸데없는 소리냐 응? 넌 말이여..
니 서방 같은 사람 만난 걸 행운이라고 믿고 살아야 혀.
응, 사람 착하제, 자상허제, 담배 안 피우고 깔끔하제,
반듯하제, 그 이상 뭘 더 바라는 거여, 이 철없는 것아.
돈이야 차차 벌믄 되지. 니 인생이 뭐가 워때서...
이 엄마 좀 봐라. 한 평생 술 좋아하는 느그 아버지 모시고 사니
천 날 만 날 마음 고생 하고 살잖는가 말이다".
엄마한테 전화 넣길 잘했다.
욕을 바가지로 먹어 머리가 띵하지만 속으론
"역시 울 엄만 사람 보는 눈은 있어..호호~~".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래! 돈 좀 없으면 어떤가.
내 남편의 늘 변함 없는 그 지극한 사랑이면
연둣빛 원피스가 문제겠는가.
마음만은 그 어떤 화사한 봄빛보다도 따사롭지 않겠는가.
맞아! 오늘 저녁에는
오로지 우리 집에서만 볼 수 있는 봄을 식탁에 꾸미는 거다.
쌉쌀하고 시원한 쑥국과 상큼한 봄동 나물 무침에
냉이 듬뿍 넣어 보글보글 끓인 된장찌개에 새콤달콤하게 무친 달래가 있고.
그 속에서 행복한 표정으로 입이 미어 터져라 밥숟가락을 실어 나르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풍경으로 말이다.
아마도 난 만족한 시선을 보내며 내 선택에 대한 확신의 미소를 지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