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두면 두번 서운하다고 했다. 한번은 낳았을때 하고 또 한번은 시집 보낼 때라고 했다. 한번은 실감 했고 아직 나머지 한번은 겪지 못하고 있는데 요즘 들어서 자꾸만 그 말이 되새겨진다.
나에게 중매말이 돌때 아버님은 몹시 허허로우신 듯 했다. 아들 둘 낳고 얻은 첫딸이기에 아버님이 나에게 쏟은 정은 각별하다 못해 유난 하셨다. 어릴때부터 아버님은 나를 품에 끼고 사셨다고 한다. 나 때문에 원거리 나들이는 하시지 못하고 가신다고 해도 서둘러 오셨다고 한다 3대 독자이신 아버님이지만 위로 둘 있는 오빠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셨고 아끼셨다는 거 커면서 귀따갑게 들었었다.
어릴때부터 내 별명이 '옹종이'였는데 아직도 난 이뜻을 확실하게 모른다. 그냥 얼굴이 자그맣고 쥐면 한 움큼 밖에 안되는 꼬맹이다 보니 애칭으로 불리워진 별명 같았다. 짖궂은 오빠들은 내가 결혼을 한 뒤에도 이말을 심심찮게 꺼내서 나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놀릴때만 썼던 별명이니까 내가 파르르 하는 건 당연했다. 왜 그런지 난 이별명이 싫었다...뜻도 모르면서.....
커면서 아버님에게 매 안 맞은 사람은 나 뿐이라고 하셨다. 맞을짓도 안 했다고 하셨지만 아까워서 차마 매를 못 댔다고 하셨다. 열 손가락중에 내가 제일 아프셨는지 모르지만 나에게만 특혜를 베푼건 다른 형제들에게 그리 달갑지 만은 않았다.
엄격한 자식 교육이 때로는 숨이 막힐듯 했지만 터무니 없이 자식들에게 매를 들진 않으셨다. 특히 아들 셋에게는 엄격이 지나쳐서 계부를 연상케 할 정도였지만 딸들에게는 너그러우셨다. 아마, 키워서 남의집에 보내야 하는 그 아픔 때문에 아껴주고 싶으셨던게 아닐까 생각했다.
내나이 스물 다섯을 넘기자 침이 마를듯이 초조해 하시는 아버님 앞에 누군가가 말을 던지고 나면 먼저 확인 하신 뒤에 나에게 알리는 완충 역활을 하셨다. 말하자면 커트라인에 걸려야 만 1차 통과를 시킬만큼 까다롭고 철저하셨다.
그 커트라인에 걸려든 사위에게 딸을 빼앗기고(?) 난 뒤에 혹독한 몸살을 앓으셨다고 한다 내가 쓰던방은 못질을 당한채 비어 있었다. 누구든 얼씬을 못하게 엄명을 내리셨다 가끔씩 그 방문 앞에서 뜨거운 눈물 쏟으셨던 아버님이셨다.
아버님 뿐만 아니고 어머님은 홧병이 생겨서 주무시다가도 한 밤중에 밖으로 뛰쳐 나가시면서 중얼거리셨다고 한다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아깝고 아까운 거....아까운 내딸 도둑맞고......' 급기야는 탕약을 지어 드셔야 할 정도로 부모님의 상심은 뼈에 스며 들 정도였다고 한다 나중에 전해 들은 이 일련의 소식에 난 통곡을 하며 억지소리를 쏟았다. '그렇게 아까우면 왜 시집을 보내 셨어요..그냥 옆에 두고 사시지............'
남주기는 아깝고 그렇다고 옆에 두고 살아야 하는 건 우리 정서에 어긋났다. 순리와 법 그리고 正道를 따르자면 품에서 떼어내야 하는 아픔을 겪을수 밖에 없는게 생의 섭리였다.
三從之道의 그 뿌리깊은 덕목을 따라야 한다는 고차원적인 순종의 미덕이 아닌, 남녀가 세상밖으로 탈출했으면 종족 보전의 그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그런 의미에서도 싱글은 어느부모도 원치 않는다. 짝을 지워서 자식들 줄줄이 낳고 알콩달콩 사는 걸 지켜 보는게 또한 부모의 원이고 부모가 할 노릇이었다.
요즘 딸아이를 보니 문득문득 부모님의 그 아파했던 심정을 고스란히 가슴에 박아야 했다. 올해 막 스물 다섯에 들어선 딸아이를 보니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저 나이때 우리 부모님은 날 떼어놓을 준비를 하셨는데 난 전혀 꿈조차 꾸지 않고 있다.
한달 남짓 있으면 햇병아리 선생님으로 사회에 첫 발을 디딜 딸아이에게 결혼이란 아직 먼 얘기다. 별 이변 없으면 원하던 시내권에 발령 받을만큼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지만 내눈에는 아직도 품속에서 옹알이 하던 그 핏덩이 모습만 남아있다. 그런데 결혼이라니.........
여아(女兒)들의 혼인 연령이 서른살에 육박할 정도로 사회 진출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다보니 스물 다섯이란 나이가 결코 서둘러 결혼시킬 만큼 늦은 나이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주술을 걸었다. 3~4년 후에나 생각해 보고 싶은데 그게 내 생각대로 되는게 아니라는거 모를리 없지만 아직은 남의 가문에 빼앗기고 싶지 않은 아까운 맘이 드는 건 사실이다.
좋게 얘기하면 아들 하나 더 얻는다고 할수 있지만 아직은 부계사회의 그 시퍼런 관습법이 살아 있는 한 남의 자식이 되어야 하는 게 현실이다. 며느리 얻으면 내 자식이 되는 이치와 똑 같지만 얻는 기쁨 보다는 잃는 아픔이 더 커다고 한다면 너무 이기적인 생각일까.
요즘 집에 내려와서 기쁨조 역활 톡톡히 하고 있는 딸아이를 보니 세월 가는게 무섭다. 딸아이는 예전에 내가 우리 부모님께 했던, 그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이쁜짓만 골라했다. 부모 마음 헤아려서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얘기로 앞날을 설계했고 손톱만큼의 근심거리도 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부모가 자식이 된듯이 위치가 바뀌어 버렸다. 아픈 얘기는 다둑여 주고 기쁜일에는 한다발의 꽃을 사다가 '아자~ 아자'를 목청높히면서 깔깔대기도 했다.
살갑고 애틋한 맘이 들수록 놓아주고 떼어주고 싶은맘은 점점 도망질 쳤다. '저 아까운 걸 어떻게 남을 줄지..........' 앞당겨 가슴앓이 하는 나를 한심한 듯이 쳐다보는 남편의 눈길도 내 아버님의 그 눈길처럼 허허로워 보였다. '그럼 끼고 살낀가.......' 그게 얼마나 더 불효고 가슴에 돌 박는지 모르냐고 하면서 애써 감정을 누른다.
아들은 장가 보내고 딸은 데리고 사는법이 있을려나. 내딸은 남 안주고 남의딸 빼앗아 오고 싶은 도적같은 이 심뽀를 어이할꼬........
앞뒤가 안맞는 생뚱맞은 생각이 해가 바뀌면서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