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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푸레나무가 전해주는 향기


BY 빨강머리앤 2004-09-25

베란다 밖으로 펼쳐진 산능선에 가을빛이 스며들어 있다. 며칠사이, 9월이 가고 있는 며칠전부터 산빛이 눈에 띄게 가을빛으로 물들어 있음을 본다. 가을로 가려는 길목에 선 숲을 바라보니 문득 가슴이 시리다.

낮동안은 여름못잖은 햇살이 뜨겁게 대지를 달구다가도 아침저녁으론 쌀쌀한 바람이 부는 동안 그런 일교차에 의해 가을이 서서히 완성해 가는 것이리라.. 또한 숲은 가을빛으로 서서히 채색해 가는 것이리라.. 그것들을 지켜보는 마음에 진한 가을빛이 먼저 들어온다.

모처럼 일찍 일어나 유리창문 가득 들어와 있는 산에 눈을 주고 가을로 향해 가는 산빛의 미세한 변화을 들여다 보았다. 마침 켜둔 라디오 에서 귀에 익숙한 음악이 흘렀다. 이 가을, 내가 참 듣고 싶었던 노래.. 카치니의 아베마리아다. 이네싸 갈란테의 목소리는 여전히 파란가을 하늘같은 투명함으로 다가온다.

한웅큼 떠보면 푸른물이 가득 담길것 같은 가을하늘처럼 푸르고 투명한 노래를 듣다보니 그 이미지가 그대로 내 가슴으로 고여 오는것 같다. 문득 가슴으로 뜨거운 것이 차오르는 느낌...눈가에 맺히는 눈물 같은것은 지금 아무의미도 없을 것이다. 가을이서  나는 푸른유리알 같은 하늘빛과 그 빛을 닮은 목소리에 취했을 뿐이다. 남편이 그러 나를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들여다 본다.

하나 아무말이 없다. 며칠을 감기로 고생을 하고 일년이 가야 한두번 갈까 말까한 병원을 다녀왔다. 그것도 의사의 의견을 무시하고 처방해준 약 마저 다 먹지 않았더니 환절기 감기가 꽤 오래 간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는데 감기 때문인지 밥맛이 없다. 열무김치 국물에 밤을 겨우 몇숟갈 떠넣는다. 감기 휴유증인지 배가 살살 아픈 증세를 겪으며 밥맛을 잃은 내가 참 낯설다.

속이 어떻든간에 아이들은 학교로, 남편은 직장으로 흩어져 가고  비로소 평온한 아침이 펼쳐지고 커피한잔의 유혹이 나를 이끈다. 커핏물을 끊이는 동안 다시 눈앞에 펼쳐진 산능선을 바라본다. 그곳에서 바라보면 반쪽짜리 베란다 창문가득히 뒷산이 들어온다. 그것도 겹겹으로 이어진 산능선... 양옆에 아파트만 없었다면 저 풍경이 완벽하게 산빛으로 충만했을 테지만, 나역시도 이 성냥곽 같은 아파트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산끄트머리를 장식하는 아파트 풍경을 눈감아 주어야 한다.

물이 끓는다. 머그컵을 훓어보다 오랫만에 청자빛 도는 자기잔을 꺼냈다. 청자빛도는 자기잔과 커피가 어울리지 않을것 같은데도 오늘은 그런 분위기를 만끽하고 싶다. 지난해 아이들이 만들어온 두개의 자기잔이 가을이면 유독 눈에 들어 온다. 아마도 가을하늘이 그처럼 청자빛으로 물드는 까닭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그건 마음이 시켜서 하는 일이니 나도 딱히 뭐라 설명할수 없는 일이다.

커피를 진하게 타서 가을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베란다 창문을 열어 놓고 신문을 펼친다. 가을빛이 눈에 따갑게 반사된다. 열어둔 창문틈으로 차가운 바람에 제법 한기가 느껴져 옷장 한켠에 말아 두었던 가디건을 꺼내 입었다. 커피향이 오늘따라 진하게 코끝을 자극한다. 커피향이 좋아 그만 저어도 좋을 커피를 여러번 취젓는다. 물푸레나무 티스푼이다.. 가지를 물에 담그면 푸른물이 든다는 물푸레나무를 깍아만든 티스푼이다.

엊그제 봉평장을 다녀오면서 유일하게 산 물건이기도 하다. 사실은 물푸레나무로 만든 찻숟가락을 살생각이 아니었다. 시장한켠에 할머니가 펴놓은 좌판에서 특별히 눈에 띈것은 아이눈동자 같은 작고 동그란 머루열매였다.

빨간 바구니에 가득 담긴 머루가 맛있어 보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어쩐지 정답고 한없이 이뻐 보여 더 끌렸다. 머루를 사서 머루알같은 눈망울을 가진 아이들과 옹기종기 머루알을 따먹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없이 따사로웠다. 그랬던 것을,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장터국밥집을 찾아 정작으론 속이 울렁거려 국밥 대신 메밀묵 한접시를 먹고 나와 보니 머루가 다 팔리고 없었다.

텔레비젼 같은데서 여행자가 찾아든 장터풍경이 참 따스했었다. 장을 돌다가 문득 후덕하게 생긴 아주머니가 차려주는 장터국밥을 한그릇 달게 비우는 그런 장면이 참 보기 좋았었다. 나도 시골장터에 들러 그렇게 장터국밥집을 찾아 가고 싶었다. 훌훌 거리며 국밥 한그릇 맛나게 비우고 싶었는데 그래, 정작으로 식탁을 앞에 두고 밥을 넘길수가 없었던 그때가 참 곤혹스러웠다. 다만 입속에 까슬하게 전해져오는 담백한 메밀묵무침을 먹으며 이곳이 봉평땅, 메밀꽃의 고향이구나 실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메밀꽃은 지고 효석문화제가 끝난 광장주변이 연극이 끝난뒤 스산한 분위기로 길손을 맞았다.효석문화제를 치룬 문학관을 지나 남안교를 건너서 작고 소박하게 펼쳐진 봉평장을 돌아보다 만난것이 물푸레나무로 만든 그릇들이었다.나뭇결이 그대로 살아있고 수저를 만들기 위해 혹은 찻통을 만들기 위해 깍고 다듬었을 장인의 숨결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나무그릇들이 향기롭게 이끌었다. 물푸레나무로 만든 그릇들을 만지작 거리다 티스푼을 몇개 샀다. 내가 두고 두고 쓸수있게, 그리고 지인들에게 한개씩만 나눠줄 물푸레나무로 만든 티스푼을 사서 나오는 발걸음이 물푸레나무 잎새같이 가벼웠다. 그 티스푼으로 차를 타서 마시면 물푸레나무 향기가 날것 같았다.차향기와 더해진 나무향기는 얼마난 근사할 것인가 생각하는 것만으로 좋았었다.

오래된 물푸레나무를 깍아 또 오래 말려서 여섯번인가 여덟번이가 옷칠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나의 그릇이 완성된다고 물푸레나무그릇 장수 아저씨가 가르쳐 주었었다.그러니 내게 와 오늘 청자빛 커피잔에 담긴 저 물푸레나무 티스푼은 오래된 향기를 지녔을 것이다. 오래되어서 잔잔한 향기를 내품는 저 나무그릇을 보며 나도 오래되어 은근한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떫은맛 나는 덜익은 열매에 불과한 내가 오래되어 은근한 향기를 갖추기 까지 많은 시간들이 필요로 할것이다. 그 인내의 세월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길지라도 나는 한발 한발 그런 향기를 쌓아가는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싶다.

물푸레나무 향기로운 가을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