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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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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서


BY 빨강머리앤 2004-07-01

내가 사는 곳에서 머지 않은 곳에 북한강이 있다. 북한강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은 삶의 위로가 된다.

아침마다 베란다 문을 열어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는 일은 행복하다.

길건너 채마밭이 있고, 채마밭과 사람사는 마을을 건너 작은 길이 경계를 짓고 다시 오밀조밀한 작은 밭과 논이 있고 그 위로 산이 하나 우뚝 서있는  풍경과

그 너머로 산들이 이어져 있어 멀고 가까운 산이 어깨를 겯고 나란하거나 빙둘러 서서 세상을 감싸안고 있는 평화로운 풍경을 바라본다.

산들은 아침마다 안개를 토해내곤 했다. 산안개와 물안개가 섞인 수분기 촉촉한 솜사탕이 촘촘히 풀어 헤쳐지며 어딘가를 향해 가는 것을 또한 바라본다.

그것중 일부는 지상에서 올려보낸 하늘의 것이기도 하고 또 그것중 일부는 북한강에서 뻗어온 푸른안개였을 것이다. 그렇다. 산능선이 이어져 푸른숲을 감싸안고 초록빛 세상을 만들어 놓은 그너머 북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는 것을 저 푸른안개가 아침마다 확인을 시켜 주고 있었던 것이다.내가 이곳에 이사를 오고 베란다를 통해 안개낀 산을 볼때 마다 내 몸 어딘가에서 촉수 하나가 자라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가진 그 촉수 하나가 예민하게 움직여 항상 물안개 쪽으로 닿아있는 것은 그곳에 바로 강이 있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나는 강쪽으로 향한 촉수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것이 강으로 나를 향하게 하든 말든. 아니 강으로 향하려는 강한 본능으로 나를 이끄는 그 촉수를 자꾸만 안으로 밀어 넣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난, 멀리 있지 않아. 내게로 오렴. 나는 항상 잔잔한 물가로 너를 맞이할께. 나를 사랑해도 괜찮아, 나는 네가 나를 향해 촉수 하나쯤 열어 놓았다는걸 알고 있는걸...'나는 산이 첩첩 가로막혀 강과 나를 차단하는 세계를 넘어 내 촉수가 닿는 강가의 느낌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짐짓 강으로 향한 내 감정의 촉수를 안으로 둥글게 말려 두고 두손을 뒷짐을 진채 산만 바라보며 강을 외면하고 있었다.

강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아니 내가 강을 향해 마음을 열어 두고 있었다. 하지만 강에 가지 않기로 했던건 강은 강일 뿐이라는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였다. 강은 언제나 잔잔하게 흘러갈 뿐 내게 아무런 답변을 줄수 없으리란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였다. 나를 불러 놓고 강은 저혼자만 흐르는듯 고여있는듯 언제 너를 내가 불렀냐는듯 그렇게 혼자만의 세상을 향유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묻는 질문에 대답을 해주기는 커녕, 너일이니 네가 알아서 해야지 왜 나한테 묻는 거냐고 되려 야단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을 향한 촉수를 거두어 들이는 일은 내 마음대로 될일이 아니었다. 강이 완전히 없어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 강은 흐름을 그만두는 법이 없었으니까..

생각지도 않았는데 강에 갈 일이 생겼다. 강을 향한 내 마음이 잠자코 숨죽어 있었는데 우연찮게 강가를 찾았다. 어젯밤이었다. 혼자사는 친구가 '강바람이나 쐬고 오자'고 제안을 했다. 이러저러한 삶의 파편들을 짊어진 나는 고독한 얼굴로 친구의 차에 동승했지만 친구는 오히려 씩씩해 보였다. 강은 가까웠다. 경춘가도를 따라 새터삼거리를 지나 강가로 향한 우리들만의 장소로 곧장 향했다. 열어둔 창문으로 강바람 섞인 밤바람이 차게 불었다. 강 저편엔 아직도 한낮의 열기가 후끈 대지를 달구고 있었지만 강가의 밤은 차고 투명했다.

강건너 강변도로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있는 가로등이 강가에 긴 불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어딘가에선 개구리떼가 와글 거렸고, 한쪽에서 이름모를 새가 쑥국, 거렸다. 강가에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이 내는 낚시줄 던지는 소리가 가끔 들릴 뿐이었다. 강가에 배를 개조해 만든 카페도 불이 꺼져있었다. 상수원 보호 구역인 그곳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길과 강의 경계에 아무것도 심어져 있지 않아 그렇게 느껴졌다.

풀이 얼만큼 자라 있었으면 그곳에 번식력 왕성한 개망초 씨앗이 날아와 정착했을 것이다. 달맞이꽃도 따라와 한켠을 차지했을 공간이었다. 이런밤, 고독한 얼굴로 강가에 찾아온 이를 위해 달맞이 꽃이 피어 있었다면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마침 하늘에 조각달이 걸려있었다. 뿌옇게 흐린 하늘엔 별은 없고 조각달이 걸려 있어 그나마 덜  외로웠다.

강으로 부터 찬바람이 불어와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돗자리를 깔고 앉아 친구와 한담을 나눴다. 생각해 보면 아무 알맹이 없는 일상들을 별생각 없이 내뱉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가벼워 지고 싶었던 것일까? 강은 말없이 어둠을 감싸안고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얘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늦게 보트가 천천히 물살을 가르며 양수리쪽으로 향했다. 아마도 그곳에 정박할 모양이다. 보트가 지나가니 천천히 흐르던 물살이 첨벙대며 몇굽이 물이랑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파도가 될수 없는 작은 물계단일 뿐이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저도 바다를 닮고 싶어 몸부림이구나..

그래, 내곁에 있는 강에 이르고 싶어하면서도 내 마음엔 바다를 들여놓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끄덕끄덕, 보트를 보낸 강물살이 점점 수그러 들었다. 아이들 얘기 끝에, 남편얘기 끝에 이혼한 그 친구가 그랬다. 너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시종 잔잔하게 고여있는듯한 북한강을 바라보다 강이 흘러가는곳을 생각해 보았다. 이 강은 양수리로 흘러 남한강과 만날 것이다. 그리고 팔당호를 지나 한강이 되어 역사처럼 유구하게 흘러 남도의 강을 만들고 남도의 강은 어머니의 바다로 물길을 안내할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 저 잔잔한 강을 고여있다 말하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내가 아침마다 산을 보며 북한강을 그리워 하듯, 강은 멀리 있는 바다를 향해 그리움을 키우고 있을 것이었다. 강가에 앉아 지금 내 앞에 놓인 강이 바다에 이르는 길을 생각해 보았다. 내가 당신한테 이르는 길을 생각해 보았다. 가까이서 밤벌레가 울었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어느정도 가벼워져 있었다.

오늘 아침, 다시 산을 마주 하고 강을 생각한다. 이젠 바다에 이르는 꿈을 가진 새로운 북한강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