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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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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옛향기에 젖다.


BY 빨강머리앤 2003-11-04

차고 맑은 밤기운을 쏟아내는 하늘을 올려다 보니 달이 하얗게 떠있다.

달빛은 대게가 오늘처럼 은빛이거나, 금빛이거나 그렇다.

달빛은 원래 같은 색일터, 그리 다르게 보이는건, 공기와 수분과 그리고

기온등이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여름밤 하늘에 둥싯, 풍성한 나뭇가지 사이로 떠오른 달은 누런 황금빛이었다.

반짝이는 황금빛은 한창 익어가고 있는 풍요로운 벼이삭 하나하나에 정성스런

입맞춤을 했던것 같은 지난 여름의 휴가, 그 밤을 기억한다.

금빛 달빛세례를 받아 황금빛 들녘의 꿈을 키워가는, 이제막 이삭이

패기 시작하던 무논엔 개구리들의 합창 소리 드높기도 했었지.

 

오늘,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니 공기중 습도도 떨어져 날이 찬 가운데 또한 맑으니

저리 말갛고 은빛나는 달이 화안하게 빛나는 것이리.

그렇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참 신비롭고 오묘한게 자연이 주는 것들이라...

그저 난 오늘밤의 형광등불빛 같은 은빛달을 바라보며 한 생각에 젖는 것이다.

 

퇴계이황 선생이 어느날 밤 달밤을 산책했다. 그날은 가을을 부르는

밤벌레들의 노래 소리가 요란했고, 달빛은 유난히 밝았으며 성근별이

총총히 돋아나고 있는 가을밤이었던 모양이다.

하늘을 올려다 보니 세삼 감회가 새로운 것들 속에

세상을 떠난지 얼마되지 않은, 유난히 사랑했던 둘째 아들 채의 얼굴이

어른거렸다.자식을 먼저 보내며 부모는 그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더니,

그말이 틀리지 않는구나...며 홀로 눈물을 글썽이다 발길을 멈추고 보니

뒤뜰, 죽은 둘째아들의 며느리가 기거하는 방앞에 와 있었다.

 

유난히 사랑을 주었던 아들이었으니 그 며느리에 대한 애틋함 또한 남달랐던 터.

방문앞에 멈춰서다 퇴계는 깜짝 놀라서 그자리에 못박히고 만다.

글쎄, 방에서 두런두런 여인네 이야기 소리가 새어나오고 또 한사람의 그림자가

촛불에 비춰 일렁이는게 아닌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귀를 방문 가까이 대고 안의 동정을 살피게 된 선생의 귀에

여인이 앞에 있는 사람을 향해 다정하게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낮에 냇가에 앉아 빨래를 하려니 어디선가 빨간꽃잎이

떠내려 오길래 당신이 내게 보낸 꽃잎이거니 싶어 건져내고

돌아다 보니 동네 개구장이들이 나를 놀리려고 그리했더라'

이어서 계속된 목소리가 울먹이며 하는말은

'왜 그리도 빨리 나를 떠났느냐, 그렇게 빨리 떠날 거면서 왜 나랑 혼인을

했느냐,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 못 견디겠다.'며 결국은 옷고름으로 입가를

가렸으나 속울음은 오열로 바뀌는 것이었다.

조분조분 낮에 있었던 일을 고해 바친 여인은 며느리였고,

그림자로 일렁이던건 아들채가 평소에 입었던 옷위에 놓인 갓이었으니...

먼저간 남편에 대한 그리움으로 밤마다 애닯은 나날을 보내고 있는

며느리의 모습을 본 선생은 당시엔 금기시 되다 시피한 양반가의 며느리를

재혼을 시켰다는 이야기.

 

그리고 몇년후 우연히 작은 고을에 들었다가 한집에 묵게된 선생.

주인이 내오는 저녁참을 먹는데 어째 그리도 음식들이 하나같이 입에 착착 달라 붙듯이

맛나는지 한그릇을 깨끗하게 비우며 ,이집 주인 취향이 나랑 비슷한가 보다 했었단다.

다음날 아침상도 여전히 꼭 집에서 먹은듯한 찬과 밥이라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던차 손님에게 내오는 버선(당시엔 자신의 집에 묵었던

손님에게 버선을 한켤레 드리는게 예의였다 함)을 신어보니 이또한

귀신같이 발에 꼭 맞아 점점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거였다.

그집을 나오며 어쩐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몇번이고

뒤를 돌아다 보는데 언듯 젊은여인이 몸을 돌려 집안으로 들어가는걸

보게 된다. 그 젊은 여인은 바로 자신이 재혼을 하도록 허락한

둘째며느리 였으니, 선생은 그집을 바라보며 부디 며느리가 행복하게

살길 바라며 발길을 돌렸다 한다.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실천하지 않은 지식은 참지식이 아니라고

선견지명을 설파하셨던 선생의 뜻을 오늘날 듣는 일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또한, 참지식이 아닌 자신의 부귀와 영화만을 위한 지식으로 무장한채

오로지 앞으로만 달리는 현대인들에게 매서운 질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언제였을까, 부석사의 가을을 만나고 오는 길에 풍기군에 있는

소수서원을 들린적이 있었다. 퇴계선생의 흔적이 곳곳에 숨쉬고 있는

소수서원의 뜨락에 가득 내린 황금빛 가을빛이 생각난다.

오로지 공부에 전념하라고 문에다 '공부공'자 모양을 만들어 달았던 곳.

흙마당에 대빗자루 쓸린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던 정갈한 소수서원의 마당과

서원 들어가는 입구에 선 좋이 몇백년을 묵었다던 해묵은 은행나무도

기억난다. 오늘 퇴계선생의 일화 한토막을 접하고 보니

소수서원의 아담하고 단아한 풍경이 꼭 살아생전 선생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었던건 아닌가 싶어진다.

 

차고 맑은 가을밤, 은빛으로 부셔지는 달과 총총히 박힌 별들이

조화롭게 깊어가고 있다. 이런밤, 문득, 옛향기에 젖어 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싶다. 그런 존경스런 어른을 가진 우린 행복하다 할것이고

오늘날 그런 어른 한분 아니 보이는것은 불행이다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