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였던, 8일 진도를 향해 길을 나섰다.
전날 호우주의보까지 발령이 되었던 남부지방엔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이
하늘이 맑게 개인 아침이었다.입추임을 말해주는듯 여기저기 때이른 코스모스가 피어나 한들거리는 모습도 심심찮게 만나지곤 했었다.
아침부터 햇살이 따갑게 내리 쬐는 가운데 썬팅을 한 차창도 못 미더워 햇빛가리개를
유리창에 부착한채 백광이 쏟아지는 거리로 나섰다.
아이들에게 까지 자외선 차단제를 완벽하게 바르고 햇빛속을 뚫고 진도를 향하기에 앞서
목포의 해안가에 있는 '남농수석관'을 들러 보기로 했다.
'조개박물관'이라 부르는 그곳엔 남인화의 맥을 이어온 허씨일가중 한분인 남농이 평생
모은 수석을 전시해놓은 국내 유일의 수석관 이라 한다.
수석관 건물 바로앞은 아침 햇살로 빛나는 바다가
펼쳐져 있고, 뒤로는 갓바위 모양의 산이 둘러싸여 있었다.
입구쪽에 나란히 늘어선 베고니아가 붉고 작은 꽃잎을 가득 피어놓고 있는 모습이랑
그리 높지 않은 산새가 아래를 내려다 보는 가운데 전면에 바다가 펼쳐진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워 그곳에 앉아 모닝커피를 한잔 마시고 첫 손님으로 수석관에 들어 섰다.
어쩌면 돌이 그런모양이 될수 있었을까 싶은 갖가지 모양의 돌들이 꼭 그 모양새에 맞게
이름을 달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룡을 닮은 돌, 월출산의 굽은 능선을 꼭 빼다 박은
돌모양을 들여다 보며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무엇보다 돌 가운데 국화꽃무늬가 새겨진 돌을
보면서 한동안은 자리를 뜰수가 없었다.
이럴때, 하루 일정을 빽빽하게 짜놓은걸 후회를 하곤 한다.
수석전시관 뿐만 아니라 산호전시실, 화폐전시실, 그리고 정말 가보고 싶었던 조개전시실까지 둘러 보려면 적어도 한나절은 걸려 야 할것 같았으니까...
식인조개, 먼 이국의 땅에서 온 크고 작은 조개, 진주를 품고 있는 조개 등등... 한결같이
저마다 특색있고,예쁜 조개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딸아인 유리안에 전시된 조개들을 만져 보고 싶어 안달을 냈었다.
산호전시실 또한 화려하고 아름답게 전시되어 있었는데 아침 첫 손님이었던 우리 말고는
관람객이 없어서 자유롭고 한가롭게 산호전시실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었다.
특별히, 산호가 많다는 제주도 바다를 그대로 재현한 산호섬이 인상적이었다.
수석전시관을 나와 해안선을 따라 해남으로 가는길, 아니 진도로 가는길이다.
진도로 가는 길에 해남땅을 밟아야 한다. 진도나 해남이나 땅이 기름지고 토양이 좋아서
어떤 곡물을 심어도 잘 자란다는 그 땅은 짙은 황토빛이다. 붉은 색을 띄고 있는 황토빛땅에서 키운 밤고구마가 한창인지 도로 이곳저곳에서 고구마를 파는 가판대가 쉽게 눈에
띄었다. 고구마를 좋아하는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황토빛땅을 닮은 고구마를 한상자
샀었다. 그 기름진 땅, 아기자기한 돌과 나무로 이루어져 보는 이들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풍경을 아름다운 배경으로 뒷바침 해주던 바다가 매립이 되는 바람에
예전에 비해 그곳 풍경이 많이 변했노라고 했다. 간척 이랍시고 조개며 게등 갯가생물들이
풍부했던 갯벌을 매립해서는 농경지를 만들어 놨는데 농경지들이 모두 쓸모없이
버려져 있어서 전체적인 풍경을 망쳐 놓았기 때문이다.
갈대가 흔들리고 갯벌이 넓게 펼쳐졌던 그
바닷가는 이제 폐허가 된 간척지만 스산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아기자기한 산 능선을 가진 남도의 땅들이 거개가 그러하듯 진도에 도착해 보니
황토빛을 띤 들녘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웅장하게 서있던 진도 대교를 유유히 건너와 우리가 건너온 진도대교를
바라보기 위해 전망대에 서 보았다.
그즈음 한창 이순신 장군에 대한 책을 읽고 있는 아들녀석에게 명량해전의 바로 그
역사적현장이었던 울둘목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겨우 몇선의 군선으로 몇백척의 왜선의 침입을 막으려던 이순신 장군이 저기 울둘목이
꺽어지는 대목에서 숨어 기다리다가 진도대교 아래, 그러니까 울둘목아래에 철선을
깔아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왜선을 가볍게 물리친 이야기를 제법 실감나게 해주었던지
아이는 한참 생각에 잠기는 거였다.
이젠 삼별초의 전적지로 갈 차례였다. 섬치곤 꽤 규모가 크고 진도대교가 연결이 되었으니
섬 아닌 섬인 진도엔 역사적인 유적지 뿐만 아니라, 남농화의 맥을 이어온 소치허련의
고향이기도 하여 예와 향의 고향으로 불리울 뿐만 아니라, 남도소리의 바로 그 고장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땅이 기름저 (옥주)라는 이름으로 불리워 졌다는 진도를 삼별초가
대몽항쟁의 장소로 삼은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다.
몽고에 굴복한 고려조정에 반발해서 끝까지 몽고와 싸우겠다는 결의를 세운
삼별초가 진도의 용장사에 석성을 쌓고 몽고군에 항쟁을 벌인곳 용장산성엔
그때 쌓았던 성벽이 조금씩 남아 있을뿐 하릴없이 잡초만 무성해져 있었다.
석축의 흔적이 남아있는 , 멀리서보면 산아래 풀과 남은석축의 모습이 아름답게
까지 보이는 그곳을 왜 찾아 왔는지를 모르는 아이들을 위해 간단한 설명을 해주는
남편의 모습이 진지했다. 그런 때문인지 아이들은 덥고 힘이 들었을텐데도 가장 멀리 있는
석축까지 씩씩하게 앞장서 갔다. 삼별초가 마셨다는 우물터는 메워져 있었다.
얼마전까진 그 물맛이 좋아 용장산성 아랫말 사람들이 길러다 먹었다고 들었는데
언제 인지는 모르지만 우물은 메워지고 석축 사이사이엔 집터를 알리는 주춧돌이
가끔이 잡초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석축의 흔적이 남아있는 가장 위로 올라가 진도를 내려다 보았다.
목백일홍이 군데 군데 피어있고, 꽃진 동백나무엔 붉은 동백열매가 선명한데
멀리 바다가 보이는 풍광이 한눈에 들어와 발길이 멈춰지는 곳이었다.
용장산성에서 8개월여를 몽고군에 대항하다 쫒겨간 루트를 따라
이번엔 남도석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남도석성은 높이 4미터의 제법 높다란 성곽을 가진, 그리고 지금도 몇십호의 사람들이
성안에 살고 있는 현재진행형인 곳이었다.
탑돌이를 하면서 성안의 민가를 들여다 보았다. 아직도 남아있는 옛우물터와 성벽을 끼고
감나무가 무성히 감을 달고 있는 모습이 평화로워 보이던 곳이었다.
옛사람들이 그러했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성의 출입문을 통해 나고 들어
보았다. 옛스러움을 몸으로 느끼고 파서... 아이들은 성곽위 조망대에 올라 예전 삼별초가
몽고군의 상황을 점검해 보던 그 자리에 서보기도 했다.
성곽아래, 홍교가 두개 눈길을 끌었다. 아치형의 작은 돌다리, 얼기설기 크고 작은 돌들을
아귀에 맞춰 참 이쁘게도 만들어서 그곳에 아이들을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남도석성과 함께 문화재급의 홍교라는 성앞 개울을 건너는 다리위에 돋아난 풀들이
파랗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것들을 뒤로 하고 운림산방을 향해 출발하는데 오른편엔 산능선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왼편엔 수평선위에 작은 점들처럼 섬들이 떠있는 푸른바다가 넘실댔다.
그런 길을 한참을 달리는데 어디선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파도에 실려왔다.
해수욕장... 그것도 이름도 없는 작은 해수욕장이 만과 만이 이어진 사이에 들어앉아
있었다. 파도가 우릴 부르는데 그냥 갈수가 없어서, 차에서 내려 바다로 달려 갔다.
일정에 없는 해수욕을 하게 생겼다며 싫지 않은 표정으로 바다에 내려서니
모래가 곱기가 분가루만 같아서 그 감촉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친정엄마가 아침에 쪄서 챙겨준 삶은 달걀을 꺼내 해송이 만들어 준 그늘에 앉아
먹었다. 엄마가 기른 닭이 낳은 달걀, 엄마가 새벽같이 일어나 쪄준 달걀은 꿀맛
다름아니었다. '바로 이맛이야'를 연발하는 아이들과 남편의 얼굴에 한껏 여유로움이
묻어나고 바다 건너 보이는 초록빛 산과 바다의 푸른색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그 이름모를 바닷가엔 하얗게 부셔지는 파도를 따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아이들이 파도를 희롱하며 모래장난을 하는 동안 남편과 나는 모래가 끝나는
지점에 있던 바위에 붙은 굴을 따먹었다. 굴의 참맛은 그 자리에서 막 따 먹는 맛이란걸
먹어본 사람은 알것이다. 그 구수하고 달콤한 맛을....
조선후기 남화의 대가인 소치허련의 발자취를 둘러보기 위해 운림산방에 들어 서니
산방앞 네모난 연못 중앙 둥근섬에 목백일홍이 화사하게 피어 있어서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걸 보는 우리는 누구나 그앞에 앉아 수련이 핀 연못과 목백일홍의
자태에 반해 사진을 찍고 싶게 마련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조심스럽게 가미를 한 인공의 아름다움...
그곳을 굳이 표현하자면 그랬다. 운림산방을 기점으로 왼편으론 초가로된 살림채가
예전모습 그대로 남아있었고, 오른편으로 돌아가면 기념관이 있어서
사진으로 나마 조선후기남화의 대가였던 소치의 작품들을 만날수가 있었다.
수묵화로 그린 동양화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고 그저 보고 느끼는 정도의
감상수준으로 그림들의 평하는기는 그렇고, 그저 나에게 있어서는 운림산방의 주변환경이
그렇게나 아름답게 보일수가 없는 것이었다.
오래된 동백나무가 햇살을 받으며 유난히 짙은 녹색의 잎새를 반짝이는데
그 중간중간에 남농의 작품인듯 수석이 한점씩 놓여있고, 또 그 사이사이엔
맥문동을 심어 놓았는데 그것들을 잘 가꾸었는듯 하나같이 선명한 보라색의
꽃대를 피어 올리고 있는 모습들이 가슴으로 다가왔다.
거기에 초당으로 만들어진 살림채가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배가 시켰으리라...
그림보는 눈이 없는 내게는 연못가의 배롱나무와 보라색꽃을 한창 꽃피우고 있는
맥문동 그리고 빨간열매를 달고 있는 동백나무와 그 사이사이에 알맞게 조화를
이룬듯 놓여있던 수석작품들이 있어 아름다운 곳으로 기억될 그런 곳이었다.
진도가 예향의 도시로 불리는 까닭은 '진도의 소리'에 그 맛이 있다고 했으나
한꺼번에 그 많은 것들을 다 소화할수 없는 까닭으로 변명을 해보며
진도를 벗어나기로 했다.
황토빛 땅과 빛나는 태양과 그 태양빛을 그대로 반사하던 바다의 모습이
아기자기한 산새속에서 아름답던 진도를 보고난 감동을 그대로 안고
해남, 육지가 끝나는 곳 땅끝을 향해 차를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