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작가의 글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추억 창고에서 끄집어 낸 글 하나를 신문에 기고하면서 `나는 추억에 관한 글은 쓰지 않으려 한다. 내 생에서 더 이상 쓸 글이 없을 그 때가 되면 조금씩 추억을 이야기할 것이다.' 라는 요지의 글을 덧붙인 것이 기억납니다.
전 그 때 추억에 관한 글들을 올리시는 분들을 보며 많은 부러움을 갖고 있던터라 그 작가의 글이 좀 의아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어떤 추억이 불현듯 아름답게 그리움으로 떠 오르면 그 때 그것을 글로 표현해 보고 싶은 것이 대개의 작가들이 갖는 마음이리라 생각했기에 더 이상의 글감이 없을 때 추억을 쓰겠다는 것이 그리 좋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추억을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는 분들을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보물창고에서 값진 보물들을 하나씩 꺼내듯 추억을 꺼내 그 빛나는 아름다움을 보여 주시는 분들께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풍성한 추억보물은 갖지 못한 제게도 참으로 소중하고 귀한 추억이 있으니 그것은 제가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매번 방학 때마다 갔던 시골에서의 추억들입니다.
시골에서 떠올릴 수 있는 첫 기억은 줄무늬 스웨터입니다. 엄마가 집에서 편물로 부업을 하셨기에 그 때 아이 셋 거두시기가 버거우셔서 셋 중에 가장 순한 절 시골 외가댁으로 보냈셨습니다.
그 때는 제 막내동생이 태어나지 않았던 때이니 제가 아마도 너댓살 어린 아이였던 때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순하다고 소문난 아이라도 엄마 품 떠난 아이는 무척 서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엄마 생각이 나도 엉엉 소리내며 울었으니 외할머니는 참으로 난감하고 힘들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린 제 손을 이끌고 친척 뻘 되는 분의 옷 가게로 가서 옷을 사주셨는데 그 노란색과 빨간색이 엇갈린 줄무늬 스웨터가 저의 시골에서의 기억중 가장 오래된 첫 기억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정 붙이기 시작한 외가댁은 그 뒤로는 해마다 저를 단골로 만들었습니다. 시골에 도착하면 늘 반갑게 맞아준 것이 있는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볏짚 타는 냄새와 거름 냄새가 뒤섞인시골 특유의 냄새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냄새조차 더할 수 없는 푸근함으로 사랑하게 되었고 버스에서 내려 외가댁까지 가는 제 뜀박질은 해마다 같은 모양의 정겨운 그림이 되었습니다.
참 희한하게도 저의 다른 형제들은 무서운 변소간과 쇠똥이 굴러 다니는 시골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저는 엄마 그리운 맘을 빼면 오히려 시골의 모든 것이 행복했으니 아마도 시골과는 뗄 수 없는 인연의 끈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매 년 여름과 겨울 방학이 되면 어김없이 시골을 찾아갑니다. 방학숙제장과 일기장을 넣은 가방을 메고 시골행 버스에 몸을 맡깁니다. 어느 때 부터인가는 어른들이 그냥 저 혼자만 버스에 태워 주셔서 시골까지 혼자 버스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직은 어렸던 제게는 버스안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참으로 무서웠습니다. 왜냐하면 어려서 아직 키기 작았던 제 눈에는 차창밖으로 보인 것들이 길이 아닌 바로 낭떠러지이거나 깊은 강물들이었으니 자꾸만 버스가 굴러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두 시간 정도 걸리는 버스여행길 내내 불안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고 그저 무서움에 식은 땀만 흘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 때 저는 처음으로 두 손 꼬옥 모아 간절한 기도를 드렸던 것 같습니다.제발 버스 떨어지게 하지 말아달라는 참으로 절박한 기도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시골에 도착하면 `휴,살았다.'하는 안도감과 함께 넉넉하고 여유로운 시골의 정겨움을 함께 느끼며 저는 신나는 방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시골에 자주 가다 보니 자연스레 시골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습니다. 외가댁이 방앗간을 하고 있어서 그 곳에서 나오는 더운 물로 빨래를 하려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다 보니 자연스레 따라온 꼬마친구들도 사귈 수 있었고 또 그 당시만 해도 텔레비젼이 귀한 시절이라 텔레비젼이 있는 외가댁은 밤이면 늘 마을 사랑방이 되었으니 전 어린 맘에도 우쭐하며 아이들과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름이면 냇가에 가서 멱을 감곤 했는데 거의가 발가벗고 물 속에 뛰어든 반면 저는 꽃이 달린 알록달록 수영모자와
빨강 바탕에 노랑 물방울 무늬의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냇물에 들어 갔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 미운 아이였을텐데도 그 순박한 시골 친구들은 그저 부러워만 했을 뿐 아무도 절 얄밉다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쨍쨍 내리쬐는 햇볕에 뜨겁게 달아오른 돌들 위에 주욱 널려 있던 아이들 속옷이 아직도 그립게 떠오릅니다.
나중에 커서 서울로 전학을 오니 서울친구들은 제가 자란 대구를 시골이라 불렀지만 그 때 그 시골아이들에게는 대구아이인 제가 도시에서 온 아이로 불렸답니다. 물론 후일 서울에서 온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그 때는 그 아이때문에 제가 자꾸 초라해지는 감정을 가졌지만 제게는 다행하게도 그 친구는 시골에 잘 동화되질 못해 그 곳 아이들의 관심밖으로 밀려나고 맙았습니다.
어쨌든 처음 얼마간은 그렇게 다른 모습으로 놀았지만 금방 시골에 동화되어 팬티만 입고 홀딱 벗고서도 부끄럽지 않은 정말 시골의 순박한 아이가 되어 갔습니다.
고스톱이란 것을 열살 때쯤 배우게 된 것도 바로 시골에서였습니다. 엄마의 작은 집이었던 곳에는 친척이면서 친한 친구였던 동갑내기 광숙이란 아이가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지내는 동안 반 정도의 날을 그 친구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아래채라 불리는 곳에서 군불 지펴 놓고 방을 절절 끓게 한 뒤 날 고구마를 깎아 먹거나 아니면 구워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날이 꿈처럼 빨리 흘러갔습니다. 어느날 광숙이와 그 오빠를 비롯해서 저보다 나이가 좀 더 많았던 먼 친척들이 함께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화투를 갖고 놀았는데 그 때 저는 정식으로 고스톱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되고 말았답니다. 손목 때리기를 벌칙으로 정한 그 날 밤 제 손목은 발개질대로 발개져서 나중에는 제가 토라져 버렸고 그 때 아지메라고 불렀던 광숙이 엄마는 오빠들을 많이 혼냈던 기억이 납니다. 오빠들은 제게 많이 봐 주었는데도 그랬다면서 다시는 잘 놀아주려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는 괜찮았습니다. 제게는 정말 순박하고 착한 친구 광숙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광숙이를 통해 친한 친구를 많이 사귈 수 있었습니다. 시골아이라고 믿기에는 너무 하얀 얼굴을 가졌던 남돌이(여자 아이랍니다.), 그리고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라곤 욕밖에 할 줄 몰랐던, 그러나 나에겐 늘 친절했던 꼭점이, 또 친가쪽으로 일가인 재순이 등등 참 많은 친구들과 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느날 광숙이를 배신하고 맙니다. 광숙이랑 같이 잠자기로 약속한 어느날 남돌이와 재순이가 저보고 같이 자자는 제안을했습니다. 시골에서도 빈부의 차이에 따라 조금은 친구들이 편를 갈라 나뉘어집니다. 꼭점이와 광숙이, 그리고 몇 친구들이 한 편이었고 남돌이와 재순이, 그리고 지금은 이름조차 까마득한 몇 친구들이 또 한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이 편이랑 또 하루는 저 편이랑 그렇게 놀던 전 조금씩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광숙이와 같이 자기로 약속했던 그 날 전 결정적으로 재순이 편에 서게 되고 맙니다. 재순이도 제겐 친척이었고 또 재순이네 집에 가면 텔레비젼도 있고 맛있는 것도 훨씬 더 많은데다 제가 좋아 하는 탁구장에도 데려가 주는 등 다른 즐거움을 많이 주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광숙이와 재순이 모두 더할 수 없이 잘해준 친구임에는 틀림없었지만 심지가 그리 깊지 않았던지 전 광숙이에게 외할머니가 나가서 자지 말라고 하셨다고 거짓말한 뒤 재순이네로 가서 그쪽 친구들과 함께 잠을 잤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침 일찍 절 데리러 온 광숙이에게 저의 거짓말은 들통이 났고 정말 그 뒤 부터 광숙이는 제게 좀처럼 그 순박한 웃음을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저도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런 어색한 관계를 풀지 못하고 광숙이와 계속겉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중학생이 된 뒤로는 이상하게 다시는 시골을 찾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골 친구들과는 몇 번의 편지를 주고 받다가 그마저 연락이 끊기고 말았는데 광숙이와는 편지조차 주고 받지 않았으니 너무 허무하게 서로 이별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요즘도 가끔 시골 꿈을 꿉니다. 꿈 숙의 시골이지만 여전히 절 들뜨게 만듭니다.뒷동산도 그대로 있고 우물도 그대로 있고 시끄러운 소리가 나던 방앗간도, 가마니로 문을 만든 뒷간도 그대로입니다. 얼마나 그 꿈이 생생한 지 잠에서 깨어날 때면 그 시골 냄새가 그대로 코끝에 남아 있는듯 느껴집니다.
제 아이들은 방학이 되어도 갈만한 시골이 없습니다. 시골에 대한 추억이 없는 남편처럼 제 아이들도 제 눈에는 추억에 관한 한은 가난한 사람으로 보이겠지요.
가끔 국도를 따라 여행을 할 때면 제 시골을 닮은 곳을 만나게 되는데 얼마나 그 느낌이 아릿한 지 때로는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언젠가,그 언젠가 제가 혼자만의 여행을 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전 제 시골을 꼭 찾으려 합니다. 그것은 이미 남편에게도 미리 약속 받아 둔 여행입니다. 아직도 시골에 친지분들이 남아 계시지만 지금 그 곳으로 떠날 수 없는 것은 저를 필요로 하는 일들로부터 아직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걱정되는 것이 또 있습니다. 저의 추억속에 자리잡은 그 시골이 제 꿈에서처럼 그렇게 변함없이 버티고 있을지 정말 걱정됩니다. 엄마는 그저 많이 변했다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그래도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곳 곳에 스며 들어 있는 모든 추억을 다 지워 버릴 만큼 그리 많이 변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얼마전 엄마로부터 광숙이에 대한 소식을 들었는데 마산에 시집가서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다음 번에는 연락처를 여쭤보려 합니다. 그냥...미안하다는 말이라도 전하고 싶어서입니다.
제 외가가 있는 시골은 경남 의령군 부림면 신반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