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비둘기'로 잘 알려진 김광섭은 ‘수필문학 소고’에서 ‘수필이란 글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써지는 글일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문학보다 더 개성적이며 심경적이며 경험적이다.(중간생략)강렬히 짜아 내는 심경적이 아니요 자연히 유로되는 심경적인 점에 그 특징이 있다.(이하생략)'로 에세이를 정의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순수하게 타인의 글을 보기에는 나는 너무 다른 경험을 하였다는 서글픈 생각이 든다. 내 직장의 손님은 처음 수줍은 얼굴로 신문에 실린 그의 글을 내 보였다. <000에 사는 독자>로 시작되었다. 그러다 <자유 기고가 ***>로 , 다시 <문필가***> 로 변천하다 지금은 <문인 ***선생>이다. 아무려면 어떠랴 / 불리우고 싶은대로 스스로 승격했는데... 문제는 그의 글이 정직성을 강열히 짜아내고 있음을 그와 말을 나눌 때마다 마주해야 하는 고역이 있었다. 그의 글을 읽고 전국 각지에서 외로운 이민자 인생 상담을 해 온다고 자랑하는 그의 독자들에게 나는 외치고 싶어진다. ' 무소의 뿔처럼 혼자는 못가도, 원숭이에게 길을 묻지는 마세요' 또다른 경험도 있는데, 무슨 문학상 수상작이라고 신년호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글을 읽고, 경악을 한 적 있다. 내 친구의 비밀스런 가정 상담을 한 상담사가 그 얘기를 그대로 소설화하여 xx문학회 상을 탄 것 이었다. 나는 모든 사실 확인을 마친 후, 이곳 저곳에 전화를 걸었다. 그 상담사와 일면식도 없었지만, 결국 그는 수상식에 참여하지 못 하였다. 또 어쩌다 알게 된 한 시인은, '팔순이 넘은 어머니라도 잘못된 것은 가르쳐야 한다'며 역설하다 '그리운 어머니' 에 대한 시를 눈물이 쏙나게 뽑아낸다. 그녀의 어머니는 양로원에서 이제나 저제나 유명한 딸을 기다리시고 계실 것이다. 인생은 '일장춘몽' 이라지만 그 춘몽의 색깔이 다 다르니 난들 별 수 있겠으랴마는 환경은 부러워 할 수 있어도 겉으로 보이는 타인의 성품을 쉽게 부러워 할 일도, '나를 당신에게 의탁하오니 행복하게 만들어 주세요' 한다고 될 일이 아닐 것이다. 성격의 고침은 타인을 부러워하는 의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물감 들이기가 아니라 자기만의 고유색을 조화롭게 내 보일 줄 아는 물레 돌리기 작업같은 것이 아닐까? 무슨 교주에게, 무속인에게 세뇌되어 사람으로서 못 할 일들을 저질렀다는 기사들이 끊이지 않고 나오고 있다. 부러워 보이는 그 무엇이 되고자, 자학적 새디스트가 되는 사람과 가학적 폭군의 결합은 옛날부터 문학의 주제로도 많이 등장했지만, 문학으로만 그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