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동화, 국화꽃 향기
--상은 폐교에서 가을을 빚다
김 경 진
일상이란 늘 단조롭게 가슴을 차지하고 있어 답답하다.
가슴속에 들어차서 나올 줄 모르는 언어의 턱에 일격을 가하고 싶다면 바람이 아직 차갑지 않을 때 어딘가 생을 관통해 깃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포착되지 않은 흔적을 찾아 가볼 일이다.
낮게 바람이 가슴으로 불어오는 시월,
(시월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한 하늘을 품고 있어 나는 허겁지겁 꽃이 피어나는 사월보다도 번잡하지 않고 은은히 빛나는 햇살을 소유한 시월을 탄다.)
아내와 아이들을 동반하고 무작정 코스모스가 바다를 향해 고개를 흔드는 해안도로를 따라 차를 몰았다.
눈시린 햇살이 얇은 구름 사이로 곧게 뻗어내려오고 출렁이는 물비늘 위를 포복이라도 하는 듯 날아가는 갈매기의 흰 배를 보면서 가을의 한 가운데를 향해 달려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나는 일상의 그 몰염치한 단조로움에서 탈출해낸 것이다.
주문진에서 속초를 향해 뻗은 해안도로를 바다를 품으며 달리다가 어디, 물치쯤에서 차를 세우고 펄떡이는 회나 한 접시 먹고 다시 숙소인 주문진 가족호텔로 돌아올 심산이었지만
38선휴계소를 막 지나다 길 가장자리에 펄럭이고 있는,아니 그것은 펄럭인다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바람의 등을 타고 하늘거리고 있는 플래카드를 스쳐보게 되었다.
<드라마 가을동화의 촬영장, 상은 폐교 4인 4색 도자기 전시장, 전방 200미터>
깡마른 강아지풀이 반갑게 고개 짓을 하는 제방을 따라 들어가자 어린 날 다녔던 고향의 시골학교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작고 초라한 폐교가 논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드라마 촬영을 위해 꾸며놓은 세트장에는 주인공 송승헌이 사용하는 침대며 쇼파와 도자기를 만드는 작업대가 오밀조밀하게 교실한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내는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장면 그대로라며 마치 송승헌이라도 만난 듯이 내 손을 잡아 끌며 이것저것 만져보다 제 흥에 겨워 사진을 찍어달란다.
아내가 가벼운 흥분 속에 빠져있는 모습을 보면서 송승헌에게 아주 조금은 질투가 나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보는 아내의 들뜬 모양을 기분 좋게 즐겨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창문 틈으로 새어 드는 가을 빛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도자기가 전시된 또 다른 교실에선 도자기를 굽는 가마 속에서 커피를 마시는 듯 고즈넉한 기분이 되어 도공이 되어도 보고 마신 커피잔을 그대로 가져 나올 수 있어서 더 색다른 생각이 들었다.
먼저 밖으로 나간 아이들은 운동장 구석에 있는 철봉에 메달려 잎이 큰 플라타너스 아래서 모래장난을 치고 있었다.
해맑은 웃음을 지닌 아이들의 얼굴에 잔잔한 가을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 어떤 실루엣이 아이들의 평온한 그림자보다 아름다울 수 있으랴!
어쩌면 아이들은 생에 딱 한번만 있을지도 모르는 가을날의 동화를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디서 국화꽃 향기가 운동장을 휘돌아 들어오는 것 같았다.
*작가 소개*
성명: 김경진
67년 전북 순창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시문학>,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서른 살의 사랑> --작가정신 발간
<나는 그리움을 타고 너에게로 간다> --도서출판 선우 발간
대전.충남 민족문학 작가회의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현재 서울우유 근무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