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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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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톱 강의를 듣다.


BY 정아네스 2019-08-13

고스톱 강의를 듣다.
 
   영월에서의 숙소는 예전부터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리조트였다. 혼자서 숙박을 하기엔 다소 부담이 되는 비용이었지만 나 자신을 위한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과감하게 예약을 했다. 숙소는 산을 끼고 있어서 경치도 좋고 조용했다.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여니 상쾌한 공기가 방안으로 흘러든다. 눈앞에 펼쳐진 초록의 향연들을 마음속에 담으며 커피 한잔을 마신다.

   오늘은 동강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어라연을 찾기로 한다. 숙소에서 어라연까지 가는 버스가 없다. 어라연 탐방로를 걷기 전에 준비 운동을 한다고 생각하며 걷기 시작한다. 휴대폰의 네비가 알려주는 대로 조용히 따라가다 보니 밭에 심어놓은 감자에 꽃이 활짝 피었다. 감자 꽃은 화장하지 않은 10대의 청순한 얼굴을 닮았다. 교복 차림의 학생들이 깔깔거리며 지나가는 모습처럼 언제나 순수하고 맑아서 좋다. ‘하얀 꽃 핀 건/하얀 감자/파 보나 마나/하얀 감자권태응의 동시 「감자꽃」의 한 구절을 읊조린다. 길가에 피어 있는 감자꽃을 온몸으로 느끼며 가는 길, 걷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이다.

   강물이 한가로이 흐르고 있다. 강을 바라보며 서 있는 카페도 한없이 여유로워 보인다. 카페 이름이 독특하다. cafe 587. 시원한 음료도 마시고 587의 의미도 물어볼 겸 카페 안으로 들어선다. 갓 구운 빵 냄새가 그득하다. 고소한 냄새에 이끌려 식빵 하나를 구입한다.

   입안에 넣으니 식빵의 속살이 솜사탕처럼 부드럽다. 과연 587이 지닌 의미는 무얼까, 뭔가 대단한 뜻이 함축 되어 있을 것만 같아 잔뜩 기대를 하고 주인에게 묻는다.
카페 이름에 붙은 587이 무슨 뜻이에요?”
그거요? 그냥 여기 번지에요.”
주인은 특별한 의미는 아니라는 듯 그저 웃는다.

   지루하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특별한 무언가를 기대하다가 실망하는 마음처럼 왠지 맥이 쭉 빠진다. 평소 아무 것도 아닌 일에도 복잡한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내 모습을 확인한다.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제멋대로 확대, 왜곡하여 스트레스를 잔뜩 받으며 살아가는 게 바로 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간결하고 단순한 삶을 동경하지만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은 어쩔 수가 없나보다. 587이라는 숫자에 별다른 의미는 없었지만 내가 식빵 두 개를 사먹을 만큼 그 집의 빵 맛만은 특별했다.

   식빵으로 든든히 배를 채우고 열심히 걷는데 아무리 걸어도 어라연을 향하는 이정표는 보이지 않는다. 아스팔트 도로가 산을 굽이돈다. 뜨거운 열기가 내 몸을 녹일 듯하다. 간간이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도 더위에 지쳐 가파른 고개를 힘겹게 넘는다. 어디쯤인가 싶어 주변을 살피니 봉래산 야생화 단지를 알리는 표지판이 서있다. 뭔가 이상하다싶지만 길을 모르니 네비가 알리는 대로 따라 갈 수밖에 없다. 가다보면 끝이 있겠지 생각하며 무작정 가는데 네비의 목소리가 더 이상 나지 않는다. 화면을 보니 네비가 멈춰 섰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아스팔트 도로가 계속되는 산 중턱쯤이다. 사람은 아무도 없고 도로와 산과 나만 있다. 앞으로 얼마를 더 걸어야 이 산을 내려 갈 수 있을지 알 길이 없지만 주저 않아 있을 수는 없기에 또 무작정 앞을 향해 걷는다. 순간, 이 무더위에 내가 뭔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싶다. ‘미쳤지, 미쳤지, 내가 미쳤어.’ 연신 미쳤지만 외쳐댄다. 한여름도 아닌데 이상기온으로 얼굴은 새빨갛게 익어가고 배낭을 멘 어깨는 욱신거린다.

   아무리 힘든 길도 끝은 있는 법이라고 했던가, 길을 따라 죽을힘을 다해 걷다보니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천문대를 지나 영월 읍내로 들어가는 길, 학교가 보이고, 버스가 보이고 아파트가 보인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 가고자 했던 어라연에는 다다르지 못했지만 혼자서 짧은 모험을 끝냈다는 생각에 잠시나마 작은 흥분이 인다.

   걷기에 자신감이 붙은 나는 청령포까지 계속 걸어가기로 했다. 뜨거운 태양은 나만 따라다니며 열기를 내뿜는다. 더위와 기 싸움이라도 하듯 나는 굽히지 않고 무더위 속을 저벅 저벅 걷는다.

좀 쉬었다 가.”
영월 땅에서 나를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는데 이상한 일이다.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고령의 할머니 한분이 길가의 나무 그네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
더운데 좀 쉬었다가 가.”
할머니는 혼자서 걸어가는 나를 불러 세운다.
안녕하세요?”
나를 왜 부르셨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잠시나마 말벗이 되어 드리고 싶은 생각에 할머니 옆에 앉는다.

혼자서 지금 어디 가는 거여?”
, 청령포 가려구요.”
더운데 택시 타고 가지? 택시타믄 금방이여.”
이렇게 걸어가니 할머니도 만나잖아요.”
할머니와 나는 앞뒤로 흔들리는 그네의 진동에 몸을 맡기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가 6.25때 피난 가다가 다쳤어. 지금은 허리에 공구리까지 쳐서 몸이 많이 안 좋아.”
할머니의 연세를 여쭈니 92세라고 하신다. 연세도 연세지만 아이를 업고 6.25때 피난 갔던 이야기를 하시니 할머니와 나 사이에 놓인 세월의 강이 넓고도 깊다고 여겨진다. 허리에 공구리(콘크리트)를 쳤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허리 수술 같은 걸 하신 모양이다. 아들과 며느리가 당신의 건강을 염려하여 같이 살고 있다는 말씀을 건네는 할머니의 표정에 흐뭇함과 자랑스러움이 묻어난다.

고스톱 칠 줄 알어?”
할머니의 가정사를 말씀하시다가 뜬금없이 고스톱을 칠 줄 아냐고 묻는다.
? 고스톱 잘 못 치는 데요?”
저 쪽에 고스톱 치는 데가 있는데 보통 3패가 칠 때도 있고, 많을 때는 5패도 모여 서 쳐.”
그제야 나는 사람들과 모여서 치는 고스톱이 할머니의 중요한 일과라는 걸 알아차린다.
, 할머니가 고스톱을 잘 치시는 구나.”
나랑 고스톱 치러 안 갈텨? 내 옆에만 앉으면 노자돈은 벌게 해준다니께. 거짓말 아니여. 정말로 노잣돈은 된다니께.”

   할머니는 금방이라도 내 손을 잡고 고스톱 치는 곳으로 달려 갈 듯 진지하게 말씀하신다.
같이 치는 사람이 를 했으면 피를 안내주고 꾹 지고 있으면 안 되지. 그건 아주 나쁜 사람들이여.”
고스톱의 기본 규칙이 인간의 도덕적 규율이라도 되는 듯 정색을 하는 할머니의 모습에 나는 그저 웃음이 난다.

같이 힘을 모아서 를 한사람이 다시 를 못하게 막아야 되는데 아주 잘못된 사람들 이 많다니께.”
할머니의 고스톱에 대한 생각은 거의 신념에 가까웠다. 평소 고스톱을 치지 않는 나지만 할머니의 고스톱 강의의 쫑긋 두 귀를 세운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어느새 30여분이 지났다.

할머니, 이제 제가 청룡포를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인사를 드리고 그네에서 일어서려는데 할머니는 할머니가 살고 있는 집으로 놀러 오라고 하신다.
우리 집이 이 앞에 아파트야. 305. 청령포 갔다가 우리 집에 오면 내가 먹여주고 재워 주고 다 할 거니께 이따가 꼭 와.”

할머니, 제가 오늘 청룡포 갔다가 집에 가야 해서요. 내일은 돈 벌러 나가야 하거든요.”
할머니는 오늘 집에 가야 한다는 내 말을 잘 못 들으셨는지 아파트 이름이랑 호수를 다시 이야기하며 꼭 오라고 신신당부한다.

할머니, 이거 고스톱 치면서 다른 분들이랑 드세요.”
나는 끼니를 놓칠 경우를 대비해 들고 다니는 과자 한 봉지를 배낭에서 꺼내 할머니께 드렸다. 너무 고맙다고, 무거운 건 못 들고 다니는데 과자 한 봉지는 들고 다닐 수 있다고 하는 할머니를 뒤로 하고 나는 다시 가던 길을 떠난다.

   혼자서 가는 길에 만나는 모든 사람이 스승이 되고, 친구가 되고, 은인이 된다. 여러 명이 어울려 유명 관광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동행에게 집중 할 수 있는 기회라면, 혼자 떠나는 여행은 타인과 내 삶을 보다 객관적이고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걸었다. 종일토록 걸었는데도 일상에서보다 덜 피곤하다고 느낀다. 내 마음의 푸른 여백에 새하얀 뭉게구름 몇 조각을 그려 넣었기 때문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