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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노가 만들어낸 도시


BY 정아네스 2019-08-13


                                                             카지노가 만들어낸 도시
 
   고한과 사북은 철도 선배들을 통해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곳이다. 선배님들 중에 고한, 사북, 정선에서 첫 근무를 했던 분들이 많다. 이 지역에는 석탄을 실어 나르던 화차가 많았기에 밖에서 일을 하고 나면 작업복은 물론 얼굴까지 새카맣게 되었다고 한다. 손톱 밑이 새까만 것은 기본이고, 몸에 묻은 석탄 가루가 남아있어 숙직실 이불이 까매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단다. 총각들은 미래의 장인, 장모가 역으로 찾아온다고 하면 석탄을 뒤집어 쓴 시커먼 작업복 차림에 놀라실듯하여 몸을 숨겼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직원과 열차이용객으로 만나 결혼에 성공한 이야기에서부터 역에 물이 없던 시절, 먼 곳에서 물을 길러다 사용한 이야기, 직원들이 직접 재래식 화장실의 배설물들을 처리해야 했던 이야기 등 선배들로부터 듣는 이야기는 먼 옛날의 전래동화처럼 언제 들어도 흥미롭다.

   고한역에 내리니 한기가 느껴진다. 날씨가 더워져서 반바지 차림이 좋을 것 같아 모처럼 새로 장만하여 입고 왔더니만 추워서 도저히 안 되겠다. 화장실에 가서 얼른 긴 바지로 갈아입고 날씨가 뭐 이런가 툴툴거리는데 '여기가 해발 700m'라는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그제야 다른 지역보다 온도가 낮은 게 당연하구나싶다. 버스 정류소 의자에 붙어있는 앉으시면 따뜻해요라는 안내문이 보인다. 지금껏 버스 정류소 의자에 난방이 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겨울철, 연세 드신 분들이 버스를 기다리며 따스하게 머무르기를 바라는 정선군의 배려인 듯싶어 마음이 흐뭇하다.

   거리를 둘러보니 상점마다 콤프 가능이라는 문구가 붙어있다. 방송에서만 접하던 콤프다. 강원랜드 콤프는 카지노 이용고객에게 카지노 사용금의 일부를 적립시켜주고 지역의 가맹점에서 현금처럼 이용할 수 있는 포인트다. 폐광 지역을 돕자는 취지에서 시작했지만 여러 가지 부작용들이 발생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어쨌거나 콤프 관련 안내문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걸 보니 지역 상인들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이 분명했다.

   사북 역시 폐광의 도시건만 고한과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고한이 정적이고 예술가적 감성을 자아내는 도시라면, 사북은 동적이면서도 이방인의 낯선 시선이 느껴지는 곳이다. 사북역에 도착하니 다른 역에서는 볼 수 없는 한 가지가 제일 먼저 눈에 띈다. 도박 중독 예방 홍보 게시물이다. ‘도박을 그만두니 일상 속에 행복이란 선물이 왔다.’라는 글귀와 함께 가족의 단란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그림이다.

   전국의 각 역에는 보통 그 지역의 풍경이나 관광지를 찍은 사진, 예술작품 등이 대합실의 빈 벽면을 차지하는데 사북역에는 도박중독 예방관련 액자가 걸려있어 놀라웠다. 거리를 나서니 더욱 놀라운 광경들이 펼쳐진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전당사 간판들이 즐비하다. 전당사는 다름 아닌 예전의 전당포다.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전당포가 사북에서는 다시 번성하고 있었다. 날이 어둡기도 전에 숙소를 향해 걷는데 카지노 자살 및 가정파괴와 관련된 현수막을 부착하고 있는 차량이 보인다.

   지금까지 다녔던 도시들과는 사뭇 다른 풍경들이다. 인터넷에서 유명 신축 숙소를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어서 예약해 두었는데 그것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 숙소 안에서 큰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니 철길이 보인다. 그저 반갑다. 익숙한 것들이 주는 평온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다. 숙소 안의 모든 물품들은 새로움으로 반짝인다. 새하얀 세면대에서 양치까지 마치자 마음속의 혼란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침대에서 편히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돌아 나오려는데 어라, 세면대 물이 빠지지 않고 그대로다. 새로 지은 건물에, 새로운 설비들이니 고장이 났을 리는 없다. 자세히 살피니 세면대 마개가 막혀 있어 물이 빠지지 않고 있었다. 세면대 근처 어딘가에 마개를 열 수 있는 버튼이 있어야 되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 혹시나 싶어 세면대 하부도 살펴보고, 손으로 당겨보기도 했지만 마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나는 최근에 지어진 건물에서 지내본 적이 없었다. 지어진 지 14년 된 주공아파트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고, 가족 여행 시에도 대부분 오래된 된 콘도에서 머물렀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고속도로 휴게소나 공공장소 이용 시에는 늘 세면대 마개가 열려있어서 지금과 같은 상황을 겪게 될 일이 없었던 것이다.

   교양 없고 무식한 티 팍팍 내는 것 같아 차마 프론트엔 물어 볼 수가 없었다. 물을 그대로 내버려 둬야하나 한참을 망설이다가 혹시 나 같은 상황에 직면한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세면대 뚜껑, 세면대 마개, 세면대 덮개, 세면대 물이 안 빠질 때, 세면대 뚜껑 여는 게 없을 때등등 다양한 단어와 문장들로 검색을 시도했지만 원하는 답은 찾을 수 없었다. 검색도 포기하고 그냥 내버려둬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누군가가 올려놓은 질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영국에 놀러가서 나와 똑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이 올려놓은 질문이었다. 마개를 눌러보라는 댓글이 있었다. 설마라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댓글대로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열려던 마개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자 마개가 열리면서 한가득 고여 있던 물이 시원하게 내려갔다. 호텔에서의 나만의 버라이어티 쇼는 그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날이 밝자 열차를 타기 위해 사북역을 다시 찾았다. 근처의 상점들이 모두 문을 열고 활기차게 고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분주한 거리를 보니 생동감이 넘쳤다. 다른 어떤 것보다 먹고 사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명제 앞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 한편으로 흐르는 착잡한 물줄기는 어쩔 수가 없었다. 사북은 생계와 유흥, 절망과 희망, 발전과 쇠락 등 삶과 얽혀 있는 모든 단어들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싶게 만드는 혼돈의 도시다.